며칠 전 왕비마마와 공주를 모시고 느닷없이 찜질방엘 갔을 때의 일이다.
날씨가 워낙 추웠던 탓인지 시설이 워낙 노후한 곳이기 때문인지 찜질방은 놀랍도록 한산했다.
원래 가려던 찜질방은 하필 정기휴일이라 다음을 기약하려 했으나 고집쟁이 조카 공주의 강짜에 어쩔 수 없이 갔던 것인데 약간 뜬금없는 일을 겪었다.
황토방이었던가 소금방이었던가, 잘 기억은 나질 않는데 워낙 사람이 없어서 딱 한사람이 누워있는 찜질방엘 공주와 함께 들어갔더니 드러누워 있던 아줌마가 반색을 하며 자꾸 말을 걸었다.
"사람이 너무 없으니까 기분이 이상하네. 추워서 그런가봐요."
공주와 나는 노코멘트.
"그나저나 오늘 평일인데 너는 어떻게 학원에 안가고 엄마를 따라왔니?"
여전히 우리는 노코멘트. 엄마가 아니라 고모라는 말도 해주기 싫었다.
"아유 엄마가 젊어서 큰언니랑 동생 같아 보이네요. 넌 오늘 학원 안갔나보다? 추워서 안갔어? 불이 어두워서 이런데서 책 보면 눈 나빠지는데..."
당시 조카는 바닥에 드러누워서 가져간 소설책을 읽고 있었다.
우리의 침묵이 답답했는지 급기야 아줌마는 벌떡 일어나 나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얜 학원 안다녀요?"
하는 수 없이 내가 대꾸했다. "네, 안 다녀요."
드디어 집요하게 나의 반응을 이끌어낸 아줌마는 속사포처럼 수다를 쏟아놓기 시작했다.
"어머나, 왜 학원을 안 보내요! 요새 학원에 안다니는 애들이 어디 있다고! 이런데까지 와서 책 읽는 거 보니까 얘는 시키면 잘하겠구만. 눈빛도 초롱초롱한 게 똘똘하게 생겼네. 요즘 공부는 엄마가 신경써서 시켜야 잘 되는 거예요."
"왜요, 학원에 안다니는 애들 많지 않은가..."
졸지에 무식한 엄마 취급을 받으며 더욱 말대꾸 하기가 싫어진 내가 혼잣말을 하듯 대꾸했더니 아줌마의 댓거리는 더욱 가관이었다.
"요즘에 학원에 안다니는 애들은 다 문제 있는 애들이에요. 엄마 아빠가 이혼해서 혼자 데리고 있거나 가난한 할머니가 키워서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애들이나 학원에 안가는 거지, 제대로 된 집안 아이들은 다 학원에 다닌다니깐요! 학원도 동네 속셈학원 같은 데는 아무 소용없고, 아주 잘 가르친다고 이름난 학원엘 보내야 돼."
공주와 나는 내심 발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뭐 이렇게 무례하고 무식한 편견에 사로잡힌 아줌마가 다 있나 싶었던 것.
정민공주는 일찌기 학원에 다니기를 거부하여 집에서 학습지 방문교사와 사촌오빠의 과외교습으로 공부를 하고 있는 상황이다. 공주가 그날 우리집에 온 것도 무수리 선생과 영어공부를 하기 위함이었는데!
조카는 아줌마 들으라는 식으로 나에게 말했다.
"내 친구들도 학원에 안다니는 애들 많은데... 현지도 안다니고 예림이도 안다니고 **도 안다니지만 걔네들 다 엄마아빠 다 있고 아무 문제도 없어."
나는 어떻게든 무식한 아줌마로부터 정민공주를 보호하며 변호도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앞뒤없이 말했다.
"애들 공부를 학교에서 가르쳐야지 어려서부터 너도나도 학원에 보내는 이 사회가 잘못된 거죠. 공부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잖아요."
순전히 나의 실수였다. 나의 논리를 받아들일 상대가 아니란 것쯤은 미리 파악했어야 하는데.... 아줌마는 한심하다는 듯 나에게 훈계를 했다.
"어떻게 공부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에요? 인생의 전부지! 공부를 잘해야 인생이 성공하는데! 공부 못하면 요새 사람취급도 못 받아요!"
"어떻게 모든 아이들이 공부를 다 잘할 수가 있겠어요. 잘하는 애들도 있고 못하는 애들도 있고, 공부 못하는 애들은 또 잘하는 특기를 살려서 행복하게 살 수 있어야죠. 저는 꼭 큰돈 들여 공부시켜야 성공하는 이 사회가 틀려먹었다고 생각해요..."
벽창호 같은 아줌마를 단시간에 설득할 수 없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내 목소리는 점점 약해졌고 더는 대꾸하기가 싫어져 그만 일어나 나가버릴까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이미 옷이 다 젖도록 땀을 뻘뻘 흘리고 있던 그 아줌마는 별 희한하고 무식한 여자를 다 보겠다는 식으로 금방이라도 혀를 끌끌 찰 것 같은 표정이더니 "참 내..."라고 중얼거리며 찜질방을 나갔다.
뒤에 남은 나는 인상을 찡그리다 그 아줌마의 뒷모습에 대고 혀를 낼름거렸는데, 그 모습을 본 조카가 물었다.
"고모, 왜 메롱 했어?"
"저런 아줌마랑은 아무리 얘기해봤자 쇠귀에 경읽기거든. 어떻게 공부가 인생의 전부겠니. 행복하게 사는 게 중요한 거지."
"맞아. 저 아줌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웃긴다."
공주는 그렇게 말하며 대수롭지 않은 듯 다시 책을 읽었지만, 나는 혹시나 조카가 아줌마의 폭언에 마음을 다치진 않았을까 걱정스러웠다.
사실 그 아줌마의 생각은 현재를 살아가는 이 사회의 대다수 엄마들과 부모들의 생각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편견이 더욱 무섭고 씁쓸했다. 그런 아줌마들은 단지 학원엘 안다닌다는 이유로 문제 가정의 아이로 단정하고 자기네 아이들과 못놀게 격리시킬 것이 뻔하고, 공부 못하는 아이들은 인간취급도 안할 테니까.
조카들이 태어났을 때 나는 그들이 자라 대학엘 가고 어른이 될 때쯤엔 입시지옥, 취업지옥도 없는 근사한 사회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꿈꾸었는데 돌아가는 꼬락서니를 보면 오히려 옛날이 좋았지.. 라고 회상하게 될 뿐 도무지 발전할 기미가 보이질 않는 것 같다.
이렇게 이기적으로 다들 사회적 특권을 누리기 위한 편법에만 목표를 두면 안되는 거 아닌가.
늘 뾰족한 대안은 생각나질 않고 불만만 가득하니 답답하기 그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