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우

하나마나 푸념 2008. 5. 18. 21:52
어린이날 선물로 11살짜리 공주는 원래 고모에게 mp3를 사달라고 했었다. 작년엔 무려 십수만원 짜리 인라인스케이트를 사주어야 했던 고모는 아이팟 셔플 정도 사주면 되겠거니 하며 선뜻 그러마고 대답했지만 공주가 원하는 mp3는 왕족의 취향답게 몹시 고급스러웠고 가격 또한 엄청났다. -_-;; 해서 깨갱 기가 꺾인 고모는 일단 공주가 5학년이 되어야만 사주기로 되어 있던 휴대폰을 대신 사주는 것이 어떨지 공주의 부모와 협상에 돌입했다. 공주의 휴대폰은 원래 할아버지가 5학년이 되면 사주시기로 약속했던 품목이라,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얼마 후 공주는 눈물을 쫄쫄 흘리며 자기네 엄마 아빠는 중학생 되기 전까지는 휴대폰을 절대로 안 사줄 텐데 자기는 그럼 이제 어쩌느냐고 더욱 슬퍼하기도 했었다.

그러던 차에 겨우 초딩 4학년짜리에게 수십만원짜리 mp3를 사줄 순 없으니, 차라리 mp3  기능이 있는 휴대폰을 사주는 게 좋겠다고 공주 본인 및 부모를 어렵사리 설득한 나는 어린이날을 며칠 지나고 나서야 정민공주와 휴대폰 쇼핑에 나섰다. 물론 휴대폰을 고르는 과정도 쉽지는 않았다. 하필 공주는 <하얀색>과 <폴더형>을 원했는데 검정색이 대세인 휴대폰 디자인 가운데 <하얀색>이면서 <폴더형>인 휴대폰은 어린이가 쓰기엔 턱없이 비쌌기 때문이다. ㅜ.ㅜ 단말기 보조금은 없어졌다지만 통화량이 어지간한 어른들이야 이런저런 할인 혜택으로 저렴하게 휴대폰을 구입할 수 있지만, 값싼 어린이 정액제 요금으로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 휴대폰은 그리 많지 않았고, 협박과 회유를 거듭한 끝에 간신히 공주는 비교적 저렴하되 어린이용 기능이 많은 <하얀색 슬라이드형> 휴대폰을 마지못해 선택했다.

휴대폰을 산 날이 하필 휴일이라 다음날에야 비로소 제대로 개통이 가능했지만, 공주는 매뉴얼도 보지 않고서 이것저것 단말기를 눌러보며 웬간한 기능을 순식간에 모두 익히더니 며칠 지난 뒤 만났을 때는 건방지게 휴대폰을 비밀번호로 잠가두고 자기만 쓸 수 있게 해놓았다. 이유를 물으니 <남들이> 자기 휴대폰 마음대로 만지고 문자 메시지 읽는 게 싫다나. -_-;;

하지만 나는 곧 무시무시한 잔소리를 시작했다. <고모랑 엄마아빠가 5학년도 되기 전에 너한테 휴대폰을 사주기로 한 이유는 어린이날 선물의 뜻도 있지만 우선 세상이 위험해서 별별 사고가 다 나기 때문에 너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혹시라도 지난번 뉴스에 나온 이상한 아저씨처럼 엘리베이터에서 누가 너를 납치하려고 하면 주머니 속에서라도 재빨리 휴대폰을 눌러서 도움을 청해야 하는데 비밀번호로 잠가두면 어떻게 빨랑 아무거나 단축번호를 눌러 도움을 청하겠니? 또 혹시라도 나쁜 언니오빠들이 너를 막 억지로 데려가려고 하면 급한데 언제 비밀번호를 해제시키고 엄마한테 전화를 할 수 있겠어? 또 혹시라도 교통사고 같은 게 나서 기절해 쓰러져 있으면 사람들이 119를 불러주긴 하겠지만 보호자한테도 연락을 해야하는데, 그때 휴대폰에 저장된 1번이나 2번 단축번호를 누르면 제일 중요한 가족한테 빨랑 연락할 수 있지만 휴대폰이 잠겨 있으면 어떻게 연락을 할 수 있겠니?>

아...
고모라는 인간이 겨우 열한 살짜리 조카에게 이렇게 무시무시한 말을 당연하다는 듯 떠들고 있으려니 스스로도 어찌나 민망하고 속상하던지, 어쩌다 세상이 이렇게 험악하게 변한 것인지 허탈하고 화가 났다. 물론 나의 저런 협박이 하나같이 <기우>라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나는 무섭게 굳은 얼굴로 내쳐 공주를 다그쳤다.

어제 보니 공주도 내 말에 확실히 겁을 먹었는지 휴대폰의 비밀번호를 풀어두고 있었는데, 슬쩍 그걸 확인하고서도 나는 씁쓸하고 참담한 마음을 돌이킬 수가 없었다. 이제 머리가 꽤 굵어진 공주는 자기가 논리적으로 납득하지 않은 이야기는 잘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데, 제가 생각해도 고모의 잔소리가 영 터무니없는 공갈협박이나 기우는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는 뜻이다.  세상이 어쩌려고 이 모양인지 원. 점점 끔찍하게 변해가는 세상을 사랑하는 조카들에게 물려줘야하는 것 같아 참으로 미안하고 가슴 아프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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