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학력위조 문제로 꼬리에 꼬리를 물듯 언론에 등장한 사람들이다.
다들 느끼는 기분이겠지만
나는 정교하게 학력을 위조하고 보란듯이 그 지위를 이용한 저들에게 분노하는 마음 보다
여전히 가방끈에 목매다는 이 사회 풍조가 어처구니 없고 슬프다.
이 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하여 얼마나 학력이 중요하면 검증 잣대로 폭로될 수 있다는 불안한 가능성을 담보로 저런 짓을 해댈까.
현재 검찰에서 조사중인 유명 학원들의 강사진들도 다들 벌벌 떨고 있다는데
그간 알게 모르게 학력을 속인 사람들이 얼마나 더 폭로되어 나타날 것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더는 알고 싶지 않기도 하고 기분이 묘하다.
사실 내 주변에도 학력을 속이고서 사회적으로 성공을 거둔, 즉 떼돈을 벌어들인 이들이 더러 있다.
이제는 나와의 연줄이 점점 약해져 더는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내는 친구도 있고
아직도 그쪽에서 가끔 연락을 해오지만 내쪽에서 피하게 되는 친구도 있는데
내쪽에서 그들을 소원하게 만드는 첫번째 요인은 그들을 위해 나도 거짓말을 해야하는 상황이었다.
R이란 친구는 모 대학 부설 전산원을 다닌 것이 학력의 전부였지만, 과외를 시작하며 모 대학을 졸업했다고 이야기하고 다녔고, 본격적인 과외선생으로 나선 뒤엔 아예 얼렁뚱땅 이대 출신이라고 주장했다. 고등학교 동창인 그 친구는 학창시절 늘 중간 이하의 성적이었는데도, 20대 초반부터는 수학 과외를 했고 ^^;; 실력정석을 거침없이 알기 쉽게 풀어주는 '실력' 때문에 학부모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다고 했다. 나중에 내가 비결을 물으니 어른 되서 수학을 다시 공부하니 몹시 쉽더라고 R은 대꾸했다. 그러고는 주변에 과외자리를 더 알선해달라고 나에게 부탁도 했더랬는데 반드시 '이대 수학과 출신'이라고 해달했다. -_-;;
또 한 친구 J 역시 R과 마찬가지로 고등학교 동창생이었는데, 회사를 다니면서도 줄곧 과외자리를 놓지않아 일찌기 투잡족을 구가하더니만, 과외 수입이 월급보다 더 많아지자 아예 회사를 때려치우고 고액과외 선생으로 나섰는데.. 예전엔 R의 속임수를 성토하더니, 나중엔 자기도 R처럼 명문대 영문과로 학력을 속이고 다녔다. 그 친구의 원래 전공은 지금은 사라진 '가정관리학과'인데 ^^;; 전공과 상관없이 주요 과목 과외선생으로 이름을 날린다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불가능하다는 뜻이리라.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과외선생은 졸업증명서 따위를 학부모나 학생에게 제시할 일은 없었으니 저런 일이 가능했을 것 같다.
R은 이제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긴 했지만, J는 현재까지도 거짓 학벌을 바탕으로 고액과외 선생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고 둘 다 '부유하게' 살며, 나름 전공을 살려 비루하고 남루하게 '저부가가치' 직업임에 분명한 번역가로 가난하게 사는 나를 몹시 안타까워 한다. ^^
내가 영문과 대학원을 갔다고 하자, 그들은 대번에 얼른 번역 때려치우고 고액과외 선생으로 나서라고 '충심어린' 조언을 하기도 했었다.
물론 나는 거짓말을 앞세워 부를 축적하는 그 친구들이 옳지 않다고 여기며 가까이 지내기가 꺼려진다. 하지만 그들은 분명 십수년의 과외 경력으로 확실한 노하우를 쌓았을 것이고 실력으로 아이들 성적을 올려주었기에 본래 학력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오랜동안 그런 지위를 누렸을 것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그들에게 애당초 거짓말을 시킨 장본인이 바로 가방끈, 명문대 학벌을 중시하는 이 사회풍조라는 점이다.
그 어떤 직업을 갖더라도 학벌이 좋으면 진짜 실력 이전에 조금이라도 인센티브를 얻는 이 사회.. 배우나 개그맨, 모델을 하는 데는 학벌이 별로 필요 없을 것 같은데도 "OO대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그 어느 나라보다 커다랗게 붙는 사회에서, 기회가 없어서, 돈이 없어서, 그다지 공부가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서, 실력이 부족해서 대학진학을 하지 않았거나 더 좋은 대학에 가지 못한 사람들은 결국 사회적 성공을 위해 사기꾼이 될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
물론 사기꾼이 되는 쪽을 선택하지 않더라도 본인의 원래 꼬리표대로 꾸준히 노력하고 성공을 거둔 이들은 가장 큰 박수와 찬사를 받아야겠지만, 무조건 꼬리표로 사람을 가늠하고 판단하고 선입견을 갖는 사람들이 득세하고 있는 한
교묘한 가방끈 사기꾼들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을 것 같다.
대학을 졸업하고 11년만에 다시 대학원 진학을 결정했던 나 역시
가방끈의 필요성을 실감했기 때문이었음을 고백하고 넘어가자.
워낙 시국이 하수상한 시절에 학교를 다닌 탓에 영문학 전공이라고 해봤자 배운 것이 너무도 빈약했던 것도 사실이고, 심도 있는 인문서적을 번역하려면 요즘 유행하는 비평 이론과 용어들을 차근차근 공부할 필요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아마도 제일 처음 충동적으로 '나도 대학원엘 갈까?' 하는 생각을 품었던 계기는
8년전이었던 당시 어느 출판사 외서기획 일을 도우며 다른 언어권 번역가나 이른바 '가방끈 긴' 번역가들에 대한 대우가 나와 다르다는 사실이었다.
비문이 아닌 제대로 된 문장은 한 페이지에서 한 군데 정도밖에 찾을 수가 없었던
모대 통번역대학원 재학중인 불어 번역가의 번역료는 무려 내 번역료의 2.5배를 넘었고
(원래 영어보다 불어나 독어 번역료가 더 비싸다. ^^;; 일어와 영어는 비슷하거나 일어쪽이 약간 더 낮은 편이지만, 물론 번역가 지명도에 따라 언어권의 차이는 완전 달라진다!)
서울대 박사과정에 있던 비전공 영어번역가의 번역료도 2배에 육박했다.
그들의 번역 솜씨가 남달랐다면 또 나도 할 말이 없었겠지만, 단순히 가방끈의 차이 때문이라면 나로선 너무도 억울했다. -_-''
게다가 결정적으로 OO재단 같은 데서 기금을 주며 장려하는 번역 프로젝트에 참여하려면 최소한 석사 이상의 학력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은 순간, 나는 일종의 재투자로 대학원 진학을 결정했던 것 같다.
당시엔 나도 번역 4년차에 접어들어 경력도 꽤 되는 편이라 번역료도 차츰 오르고는 있었지만, 욕심이 더욱 생겼던 것. (물론 재단 공모 번역 프로젝트에 참여하려면 석사 학위 갖고는 어림도 없고 최소한 박사과정 이상이나 강사 정도는 돼야 한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ㅋㅋ)
물론 겉으로 보기엔 설렁설렁 놀아도 될 것 같던 대학원 시절
실제로 겪은 공부의 어려움 때문에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도 않고, "이왕 시작한 거 박사도 해보지?"라는 주변의 충고에 버럭 화를 낼 정도로 공부는 내 체질이 아니라고 단언하고 있지만
길어진 가방끈은 내용 면에서나 포장 면에서 모두 나에게 확실히 이로웠다.
나로선 대학원 수업에서 난생 처음 들어보았음이 분명한 비평과 이론 용어와 인명들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인문서에도 툭툭 튀어나오고 있으며, 현재 수준의 번역료에 이르게 된 건 10년을 넘긴 무시 못할 경력 덕분도 있겠지만 어느 정도는 '석사 나부랑이'라는 가방끈도 한 몫했을 거라 믿는다.
하지만 나는 더 공부를 하고 싶지도 않고, 가방끈을 늘이고자 괴로운 학업을 이어 더 거창한 학위를 받고 싶지도 않다.
내 가방끈은 이미 너무 길어졌다고 구박하는 이들도 있지만 ^^; 내 기준으론 여기가 딱이다.
속물근성의 사회적 잣대로도, 입신양명의 야심을 어느정도 품고 있는 나만의 잣대로도 흡족하다고 생각되므로.
그렇다고 학력을 속여서라도 더 큰 성공과 주변의 관심을 바랐던 이들에게 나처럼 직접 뭘 하라는 뜻으로 이 글을 올리고 있는 건 절대 아니다.
쓰고 보니 내 자랑 같기는 하지만, 앞으로는 적어도 우리 조카들이 이 사회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될 미래의 세대에는 가방끈 때문에 사기꾼들이 득시글거릴 필요는 없는 '실력' 위주의 세상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 이 지루한 글의 결론이랄까.
얼마 전 '임권택' 대학이 생겨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약간은 희망을 품었다.
실력만 있다면 학벌이 없어도 거장 소리를 들으며 교수가 되고, 자기 이름 딴 대학도 세워지고 더불어 경제적인 부도 거머쥘 수 있고
하버드 같은 데서 앞다투어 명예학위를 주겠다고 나서고(또 그걸 당당히 거절도 하고! -- 개인적으로 나는 빌 게이츠가 하버드의 명예학위를 받지 않았으면 더 멋있었을 거라 여긴다 ㅋㅋ)
그런 사회 분위기가 어서 뿌리를 내리면 참 좋겠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