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창회

하나마나 푸념 2007. 4. 18. 23:34

드물긴 하지만 평일 점심무렵에 백화점 식당가엘 가면
아주 곱게 차려입으신 어르신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연세가 최소한 일흔은 넘으셨을 것 같은 할머니들이지만, "어머, 얘 너 어쩜 옛날이랑 그렇게 하나도 안 변했니, 호호호.."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대로 소녀같다.
그래서 대부분 비싯 웃음이 나오는데...
백화점에서 단체로 곱게 차려입고 (그 분들 중 서넛은 대개 엘리자베스 여왕이 쓸 것 같은
멋드러진 모자까지 쓰셨다) 만나서 점심 먹고 차 마시고 수다떠는 여유로움을
누릴 수 있다는 건 분명 그 어르신들의 특혜란 생각이 든다.
같은 나이에 아직 재래시장 입구나 전철역 앞에 쪼그리고 앉아
푸성귀를 파는 할머니들도 있는데, 그 분들은 한달인지 두달인지 모를 동창회 모임을 위해 그날따라 유독 옷장을 뒤져가며 성장을 하셨을 테고, 오찬이 끝나면 우르르 백화점에서 단체로 쇼핑을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늙어서도 그렇게 '격식차려서' 친구들을 만나러 다니는 모습을 보면 처음엔 미소를 짓더라도 슬며시 기분이 묘해진다.
왜 '동창회'라는 건 늘 그렇게 자기과시의 장이어야 하는지.

울 왕비마마도 예외는 아니다.
한달에 한번씩 셋째 화요일에 동창들이 모여 점심을 먹는데...
백화점파 할머니 일당들처럼 요란하진 않지만, 그래도 꼭 옷과 머리 때문에 신경을 쓴다.
그간 와병 때문에 동창회를 두달이나 빠져서 이번엔 꼭 가야한다던 왕비마마는
어제 아침 댓바람부터 무얼 입고 나가나 옷장과 씨름을 했다.
누구나 계절이 달라지면 입을 옷이 없다고 타령을 하는 게 당연하겠지만
울 엄마의 경우엔 역시나 옷장 가득 옷이 들어 있고 동창회용의 점잖은 옷들도 꽤 된다.
옷 없다고 타령이 시작되면 내가 먼저 짜증이 나기 때문에
내 옷은 잘 안 사도(난 언제부턴가 옷에 거금을 들이는 것의 가치를 잘 못 느끼겠더라^^)
엄마 옷은 턱턱 사드리는 편이라 더욱 그렇다.
그런데 또 카드춤 한 판 요란하게 추어서 옷을 사드리면, 괜히 비싼 옷 샀다고 또 난리다.
아으...
그럼 동창회 갈 때 입을 옷 없다는 소리나 하지 말든지~!

일단 입을 옷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눈에는 있는 옷도 제대로 안보이는 법..
결국 내가 코디까지 다 해서 골라준 옷을 입은 엄마는
별 볼일 없는 내 드라이 솜씨로 그나마 환자모드를 확실하게 탈피하고 동창회엘 갔다.
다녀와선 또 며칠 어떤 아줌마가 어디로 해외 여행 다녀왔고
어떤 아줌마가 어디에 땅을 샀으며... 어떤 운동을 해서(또는 어느 비만 클리닉을 다녀서) 살을 얼만큼이나 뺐다더라...  뭐 이런 얘기를 할 거다.
엄마 친구들이 정말로 얼마나 부유하고 여유로운지는 잘 모르겠지만, 울 엄마가 보기엔 당신이 친구들보다 한참 못살고 재테크 재주도 없어 평생 가난하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얘기다.

완전 대규모 동창회도 아니고, 열명 남짓 모이는 모임에서 아줌마들이 만날
옷 신경쓰고, 머리 신경써서 만나가지고는 늘상 그런 얘기만
한다면 대체 무슨 재미로 한달에 한번씩이나 만나는지 난 도무지 모르겠다.
그나마 엄마의 사회생활이니 막을 생각은 없지만
나라면 그런 동창회 돈주고 나가래도 싫다.

졸업 이후 뿔뿔이 흩어졌던 대학동기들을 모아서 몇년 전 떼거지로 몇번 만나봤지만
결국 서로 코드도 잘 맞지 않는 친구들의 대규모 모임은 역시 역부족이란 걸 느꼈더랬다.
개개인끼리는 서로 소통이 되는 부분이 있더라도, 단체로 모아놓으니
한다는 얘기들이 하나같이 주식, 부동산 따위의 재테크 얘기 아니면
애들 교육얘기, 기껏해야 음담패설이었고, 잘 나가는 것 '같은' 친구와 별 볼일 없는 것 '같은'
친구들의 위화감도 만만치 않았는데, 모아놓은 돈도 없고 재테크할 위인도 못 되며 걱정할 처자식 또는 남편자식 없는 나 같은 한량이 제 아무리 중심을 잡으려 해도, 안되는 건 안되는 일임을 실감했다.

앞으로도 내게 대규모 '동창회'라는 이름의 모임은 없을 거다.
개별적인 옛친구 상봉이라면 또 모를까...
그리고 다 늙어서 친구들을 만나도 절대로 엘리자베스 여왕이 쓸 것 같은 모자에 우아한 성장을 하고 만나는 일은 없겠지. 청바지에 키높이 운동화라면 몰라도... -_-;;
친구가 보고 싶으면 지금처럼 그냥 몇명씩, 때론 일대일로 그리움을 풀어내면서 살리라.
그러다가 혹시라도 나와의 만남을 자기과시의 장이라 여기는 친구가 있으면
단칼에 잘라버려야지. 흥!

아무려나 다음달 셋째 화요일에 또 왕비마마의 옷타령을 들을 생각을 하니 짜증부터 앞선다.
백화점 봄정기세일 할 때 모셔가서 한판 지르시라고 했어야 하는 건데...
아니지.. 그나마 동창회 나갈 정도로 건강해지신 걸 기뻐해야 하는 건가. 흠.
하여간에 동창회.. 말만 들어도 참 싫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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