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일까지 전시중이었던 근대서화전과 함께 오백나한전을 보러 중앙박물관에 가면 좋겠다고 5월 내내 별렀으나 결국 근대서화전은 놓쳤고, ㅠ.ㅠ 13일 끝으로 알고 있던 오백나한전이라도 꼭 봐야겠다 싶어 지난 월요일에 뛰쳐나갔다. 흐렸던 하늘이 점점 개면서 더욱 선명하고 초록초록하게 보이는 나무 색깔부터 감동.
매번 이촌 지하철역에서 나와 진입하거나 주차장에서 들어가 늘 건물을 보던 시선도 고정되어 있었는데 우연히 전시장에서 만난 지인들과 점심을 먹고 다시 들어가는 바람에 지상 정문쪽에서 걸어들어가며 바라보이는 중앙박물관의 모습에 또 한번 반했다. 트인 공간으로 보이는 남산.. 좋다.
배낭은 앞으로 매야하고, 먹물 조심해달라는 구구절절 주의사항을 듣고 전시장에 들어간 순간 흡! 전시 기획을 누가했는지 모르지만 박수쳐주고 싶더라. 대부분 유리상자 안에 가둬놓지 않아서 더욱 기뻤고.
브로셔에 든 스타 나한상부터 하나하나 정성껏 카메라에 담으며 마음이 경건해지는 것 같았다. 어휴... 어떻게 이렇게 하나하나 느낌이 다 다를까.
아래는 김승영 작가의 설치미술 주변 유리 안에 들어 있던 나한상들이다. 표정의 느낌 별로 모아놓은 듯.
전시 보러 가서 늘 하던 놀이대로 나한상을 하나만 가질 수 있다면 뭘 가질까 여러번 둘러보며 고민했는데 도무지 하나만으론 딱히 마음을 정할 수 없었던 반면, 지그시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울컥 눈물을 흘릴 뻔한 나한상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이 얼굴이었다.
절에서 여자 신도들에게 형식적으로 부르는 '보살님'이란 호칭에 정말로 어울리게 평생 사찰과 밀접하게 살아온 외할머니가 떠오르면서 쟁쟁한 할머니 목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덩달아 자비심 보살님인 울 엄마 영자씨도 생각나고. ㅠ.ㅠ
엄마는 젊었을 때 외할머니랑 하나도 닮은 구석이 없었는데 늙어가면서 점점 할머니랑 똑같은 얼굴이 되었다. 이모나 외삼촌들이나 이웃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나도 엄마랑 나가면 하도 안 닮아서 며느리신가보다고 하는 소리를 종종 듣는데, 나이 더 들면 닮은꼴이 될까? 째뜬 우스운 건 외할머니 키가 170, 울 엄만 160... 그리고 난.. ㅠ.ㅠ
딸이 자기 엄마보다 키 작기가 드물다는데 울 엄마도 나도 자기 엄마보다 키 작은 딸이란 거 하나는 확실한 공통점이다.
전시장을 두바퀴쯤 돌고 나서 구석 의자에 한참 앉아 있다가 다시 인상적인 몇몇 나한상을 다시 눈과 마음에 새기고 돌아나서려니 이번엔 얼굴이 다 닳아 거의 없어진 나한상이 눈에 콕 들어왔다.
파피가 먼저 전시보러 갔을 때 사진 작품의 질이 ㅎㄷㄷ하다며 엄청 탐났으나 품절이라 못구했다는 대도록은 아예 구경도 할 수가 없었고, 아쉬우나마 저렴한 엽서 크기의 소도록을 집어들고 돌아왔다.
그렇게 좋더란 얘기를 하도 많이 들어 벼르고 별렀으나 이제야 드디어 가본 성북동 한국가구박물관. 4월초쯤에 예매 사이트엘 들어갔는데도 5월 말밖에 자리가 없었다.
개인박물관치고 가장 입장료가 비싸다는 해설사의 말마따나 무려 1人 2만원. 근데 둘러보고 나오며 아깝단 생각이 별로 들지 않았다. 개인이 이 정도 한옥집과 고가구를 모으고 유지하기가 쉽진 않겠지. 오히려 꽤 규모가 크고 직원도 많던데 관람료와 대관료로 계속 박물관 유지가 가능할까 셈에 느린 나로선 감이 잡히질 않았다. 예전엔 뜨르르하는 부자였을지 몰라도, 혹은 후대에 들어 재산관리를 잘못했는지 어쩐지 가구박물관과 부지가 경매에 나왔다는 얘기를 종종 들었으나 아직 완전 부도나서 넘어가진 않은 모양이다. 이러다 나 구경가기 전에 경매로 넘어가는 거 아닌가 조바심이 나기도 했었는데, 관람객은 계속 꽤 많은 듯.
비내린 뒤 개인 하늘이 정말 푸르렀던 날이었다. 대문이 열리고 마당으로 들어서자마자 감탄하며 나도 모르게 사진을 찍었는데 10초쯤 뒤 건물 외부 포함 모든 사진촬영은 지정된 곳 이외엔 절대 금지라고 하더군. 으으 뻘쭘하여라. 그래도 눈치 못했는지 사진 당장 지우란 말은 하지 않았다. ㅠ.ㅠ 이렇게 공개된 곳에 올렸으니 삭제하라고 연락오면 그때 삭제해야지.
박물관 관장이 거의 고등학생 때부터 고가구 보는 눈이 있어 버려진 고가구들을 모으기 시작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해설사가 하던데, 그런 안목을 갖춘 건 역시 집안에서 익히 골동품을 보고 자란 경험이 쌓여서 작용했을까? 우리 친가, 외가에도 옛날에 쓰고 있던 호족반, 개족반, 서안, 엄마가 시집올 때 해왔던 자개장... 이런 것들도 죄다 내버리지 않고 그냥 두었다면 어땠을까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하기야 쓰기 멀쩡한 상태였는데 불편해서 버렸을 리는 없고 깨지고 망가지고 그랬으니 버렸을 거다. 엄마의 혼수품이었던 자개장은 나도 어렴풋이 기억하는데;; 엄청 무거워서 셋방살이 잦은 이사에 옮기기도 힘 들었지만 균형이 틀어져 이불장쪽 미닫이문이 잘 안닫히던 때가 있었다. 물론 전시품 자개장처럼 엄청나게 화려하게 전면에 꼼꼼히 자개를 입힌 골동품도 아니었고 듬성듬성 도안을 넣은 자개가 군데군데 떨어져나갔던 것 같다. ^^;
전통 고가구야 다 아름답지만 누가 하나쯤 가지라고 한다면 앉은뱅이 책상인 서안을 가장 탐내는 편인데, 평평한 건 사대부들이 쓰던 거고, 끝이 위로 말려 올라간 건 사찰에서 쓰던 '경상'이란다. 두루마리 경전이 되말리지 않도록 펼처놓기 좋게 만든 거라고. 오호 그런 거였군. 우리 할아버지가 옛날에 쓰시던 저렴이 서안도 위로 말려 올라간 형태였던 것 같다. 나중엔 사대부들도 아름답고 좋아보여 널리 썼다니 한국전쟁 이후에 유통되던 가구들도 비슷하게 만들어진듯.
암튼 근데 전시품 중 요번에 가장 탐났던 건 뭐니뭐니해도 책함! 사진찍고 싶은데 못찍어오니 인터넷 이미지를 뒤졌다. 역시... 중앙지 기자에겐 사진을 찍게 해주는군.
책의 권수에 맞게 맞춤형으로 만들어 함째로 들고 이동해 읽었단다. 아.. 갖고 싶어라.. 사진 출처는 ㅈㅅ일보 +_+
1시간동안 다섯채 정도 되는 한옥과 그 안에 전시된 고가구를 둘러보고 나와서 드디어 사진 촬영이 가능한... 순정효왕후가 살았다는 한옥집 앞마당에 이르렀다. 사람들 없이 찍는데 성공.
민망하지만 누마루쪽도 담긴 온전한 사진은 이것뿐이라 얼굴을 가렸다. ㅎㅎ 나중에 한옥을 짓고 살게 되면 나도 저렇게 창호지 분합문과 여닫이 유리문으로 이중문을 해달아야지 ㅋ
전시는 12월 23일까지여서 10월부터 중앙박물관 지도 전시회랑 같이 보러가려고 별렀으나 결국 지도 전시는 놓치고 이것도 끝나기 나흘 전에 겨우겨우 보러 갔었다. 아모레퍼시픽 미술관 처음 가본 건데... 대기업에서 홍보용이든 탈세용이든 아니든 작품 소장하고 미술관 운영하는 거 난 찬성일세. ^^;
전시는 생각보다 넘 좋아서 여러번 감탄했다. 서양 문화에선 그림을 일단 벽에 턱 걸어놓고 상시 감상을 하는 편이라면 겸손을 군자의 미덕으로 여기는 동양에선 병풍이나 족자로 그림을 갖고 있다가 가끔씩만 꺼내서 감탄하는 게 일반적이라고 한다. 혼자 보기도 아까워서 좋은 그림을 감상할 양이면 친구들 지인들 불러다가 핑계김에 술도 마시고 시도 막 읊고.. 그림 감상이 풍류의 일환인 거지. 그렇다면 내가 허세 떨듯 미술관 구경다니는 것도 내 나름의 풍류 취미라고 우겨야겠다.
설명도 없이 사진만 무진장 찍어와서 더 뭐라 적을 이야기도 없다.
그냥.. 전시는 좋았고, 병풍의 종류가 어마어마했고, 그림속에 모두 각각의 이야기가 담겨있었고, 구석에 작게 보이는 게 한 마리, 꽃 한 송이, 벌레 한 마리도 그냥 괜히 그려 넣은 건 없었다. 그리고 기록화 느낌의 병풍은 사진기 없던 시절 옛날 사람들이 '참석 인증샷' 정도로 나눠갖던 기념품 역할도 많이 했던 모양이다.
이토록 화려한 병풍을 실컷 보고 집에 오니, 차례와 제사 때 세워두는 우리집 병풍이 어찌나 초라하게 느껴지던지. ㅎㅎㅎ
좌: 해치. 기린, 백탁, 천록... 뿔달리고 몸뚱이에 털이 얼룩덜룩한 상상의 동물을 도무지 분간 못하겠다. 이건 뭐라고 적혀 있었더라. +_+
중: 살아있는 오징어가 헤엄치는 모습을 자세히 관찰하고 그린 게 틀림없다!
우: 조개와 해당화도 각각 무슨 의미가 있었는데 ㅠ.ㅠ
세계지도를 그린 병풍도 있고..
평안 관찰사가 부임하는 모습을 그린 거라던가.. 암튼 평양 시내를 그린 병풍도 있고!
청설모가 토종 다람쥐를 몰아낸 외래종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내가 어디서 잘못 들었나? 암튼 옛날 병풍 속에도 청설모가 있더라!
설치류 싫어하는 내 눈에도 좀 귀여워보여서 얘만 클로즈업해 찍어보았다.
놀라운 자수 병풍도 있었고...
궁궐에서 열린 연회 장면을 그린 병풍은 볼 때마다 신기하다.
궁중 화원들이 행사를 지켜본 뒤에 상상력을 발휘하여 조감도처럼 실제보다 더 장엄하게 그려 넣었겠지.
사람들 한사람 한 사람 표정이 다를 때도 있고 재인들의 춤사위가 살짝 다른 것도 찾아보는 묘미가 있다. 물론 그렇게 자세히 보려면 멀미가 필수.. ㅋㅋ
오디오 가이드 대신에 박물관 앱을 깔고 이어폰으로 설명을 들었는데 버그가 있는지 자꾸만 튕기고 에러나고... 자수 병풍 몇개는 송혜교 목소리로 작품 설명이 나왔고, 아모레퍼시픽 회장님이 직접 설명 녹음도 했던데 그건 쫌;;; +_+ 굳이 왜 그렇게까지!
남편따라 베트남에서 지내다 잠시 귀국한 친구와 쌓은 5월의 추억 기록이다. 아이클라우드 용량 절약을 위해 사진 지우기 전에 후다닥 아까운 사진만 여기다 퍼놓았었는데 뒤늦게 정리한다. ㅠ.ㅠ
여긴 북촌의 무슨 공방이었던 것 같은데... 아마도 주방인듯한 문짝에 조르륵 올려둔 고양이 인형이 예쁘다.
이 얼마만에 보는 펌프인가! 옛날 친가, 외가 마당에 모두 이런 펌프가 있었다. 빨갛게 녹이 슬었는데도 맑은 물이 올라와 신기했던 기억이 난다. 몇년전에 월요일마다 엄마가 애청하시는 <우리말겨루기>에 '마중물'이 문제로 나왔는데, 엄마랑 나랑 동시에 답을 외쳐 서로 쳐다보며 웃었더랬지.
익선동의 어느 카페 마당이었던듯. 이때 가보고 오래된 좁은 골목과 학옥집들이 맘에 들어서 누굴 시내에서 만날 때마다 일부러 약속장소를 종로쪽으로 정해 거의 반년간 한두 달에 한 번씩은 갔더랬는데 벌써 이미 많은 곳이 변해버렸다. 아직 골목 곳곳에서 살림집으로 살고 계시던 할머니 할아버지는 얼마나 시끄러울까 걱정되 되고;;
같은 날 세운상가엘 왜 갔더라? 뭔가 행사가 있다는 안내문을 받았던 것 같다. 옥상에서 작은 공방 좌판이 열려 있었던 건 별 흥미가 없었는데, 그 옆 전시실에서 빈티지 그릇 벼룩시장이 열려 반색하며 구경했다.
언제부턴가 종로구에선 한옥집들을 사들이고 개조해서 한옥문화원이라든가 한옥 체험관이라든가 한옥도서관으로 일반에 공개를 하고 있다. 궁궐 쌤들 따라서 북촌 답사 따라갔다 발견한 보물 같은 한옥집들을 혼자만 알고 있기 아까워서 친구들도 데려갔다. 당연히 다들 어찌나 좋아하던지. 한 여름에도 누마루에 앉아 밖을 내다보면 정말 시원하다. 이날은 비가 와서 나름대로 또 운치가 있었던 기억...
달력을 찾아보니 중앙박물관 <칸의 제국 몽골> 전시회를 다녀왔던게 벌써 한달도 더 지난 5월 21일이다. 기억 휘발되기 전에 후기 남기려고 바로 며칠 뒤에 사진만 대충 골라 올려두고는 까마득히 잊고 살았다. 5월말엔 그러고 보니 나름 친구들이랑 많이도 놀러다녔네그려.
몽골은 언제고 꼭 가보고싶은 여행지이기도 해서, 몽골 관련 전시라기에 기대가 컸다. 중박에서 특별전시하는 공간인 본관 건너편 전시실이 아니라, 본관 내부에 따로 기획전시실이 마련되어 있더라. 만나는 장소를 당연히 매표소 앞이라고 했다가 예상한 곳에 매표소가 없어 다들 좀 당황했으나 우리에겐 휴대폰이 있으니 헤맬 일은 없었다.
벌써 한달도 더 지나버려서 사진을 보아도 그때 느꼈던 세세한 감동이나 신기함은 잊히고 말았다. ㅠ.ㅠ 암튼 이번 전시에서 가장 기억에 남고도 거슬렸던 건 해설하는 분이 자꾸만 '저희 나라'라고 설명했던 거다. 몽골을 우리나라보다 높일 생각이 있었던 건 분명 아니겠고 관람객을 너무 존대하려다 보니 초심자의 실수겠거니 짐작하면서도 너무 귀에 거슬려서 나중엔 설명듣다 뒤로 빠지기도 했다. 중앙박물관의 도슨트도 다들 자원봉사로 알고 있다. 기본 소양은 다들 검증되었을텐데 왜 기초적인 말실수로 점수를 깎이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그날의 짜증스러운 마음 같아선 중앙박물관 게시판에 전시 날짜와 시간대를 올려 담당자의 잘못을 '시정'시켜야 하는 것이 아닌가도 고민했으나, 결국 게을러서.. 그리고 또 뭔가 짠하기도 해서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ㅋ
하여간에 전시는 볼만했다. 관람료가 6천원이라보니 ^^; 특별기획전시 치고 비싸지 않아.. 뭐 이런 느낌이었고 그래서 가성비가 좋았다고 느꼈던 것도 같다. 몽골은 국보급 문화재를 전시하는 대규모 박물관이 마땅히 있질 않아서 몽골에 막상 가도 이런 정도의 문화재를 한꺼번에 보긴 힘들다고 하는 것 같다. 암튼.. 몽골의 선사시대부터 칭기즈칸 시대까지 생활상과 역사를 훑어볼 수 있고, 신기하고 멋진 유물과 기록들이 꽤 많았다.
아래는 실제로 사용했던 걸까, 의례용일까 아니면 장식품일까 궁금했으나 결국 묻지 못했던, 주요 유물 안장이다. 사진 잘 찍었다고 스스로 흡족했음. ㅎㅎ
황후의 옷 치고 덜 화려하다고 느낌 ^^;
아마도 황후의 신발;;
'마두금'이란 전통 악기
정교한 공예품으로 소개된 물건들이었던 것 같은데 굳이 왜 찍어왔는지, 내가 왜 올렸는지 기억 안난다. ㅠ.ㅠ 경복궁 꽃담이나 아미산 굴뚝처럼 몽골에서도 도자기로 정교하게 구운 장식물들을 만들었단 게 신기했나? 에효...
암튼 몽골 전통 가옥인 게르의 대나무 뼈대를 벽처럼 세워 공간을 나누고, 마차와 식기 같은 생활 유물도 볼 수 있게 해놨다. 칸, 카안, 카간..의 차이를 듣기도 했는데...
2018년에 본 첫 그림전시는 뜻밖에도 신윤복과 정선 그림이었다. 2017년 마지막 본 전시가 고궁박물관 희정당 벽화 총석정 그림이더라니.. ㅎㅎ 뭔가 절묘한 인연의 연장선?
동대문 DDP에서 몇년전부터 계속 간송미술관의 수장고에 첩첩이 쌓여있던 미술품들을 교체전시하고 있는데, 혜원의 전신첩과 정선 그림을 야금야금 나눠 보여주는 바람에 꽤 여러번 갔었지만, 요번처럼 혜원 전신첩을 대거 한꺼번에 구경한 건 처음인 것 같다. 영하 18도 예보가 있던 날 하필 이 전시를 보러 가자고 그랬을 때는 에이... 이왕 혹한을 떨치고 나간 거, 바로 직전 포스팅에 적어두었던 기대전시 중 하나를 보면 좋겠다는 생각도 없진 않았으나, 막상 가서 보니 그저 좋았다.
혜원과 겸재의 그림만 전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옛 그림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디지털 작품들도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역시나 나의 편견으로 괜히 꽁해가지고는 나는 원본이 좋더라, 특히나 디지털로 되살린 현대 미술품 나는 원래 안 좋아해! 라며 궁시렁거렸었는데 ㅋㅋ 그 또한 막상 보니 좋았고 으아~ 감탄한 작품도 있었다. 아이고 민망하여라. 앞으로는 '나는 원래 어쩌고 저쩌고...' 이런 말 함부로 안하고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다시한번 했다. 절대고, 원래고,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인가. 사람이 좀 변하기도 하고 유연하게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지 말이야... 간송도 요즘 트렌드에 어쩔 수 없이 기개를 꺾었는지, 휴대폰으로 플래시 안 터뜨리면 원본 사진도 찍게 해주더라. 물론 작품 보호를 위해 조명을 하도 컴컴하게 해놔서 잘 나오지는 않지만서도..
해서.. 원본 대신 입구에 진열된 혜원 전신첩 설명을 찍어왔다. 어차피 그림 제목도 혜원이 정한 게 아니라 후대 사람들이 편의상 붙인 것인데, 그 아래 요즘 유행하는 언어로 붙여놓은 태그 글귀들도 기발하고 재미났다. #BGM빵빵 #알콜뽀샵 #사대부스웩.. 막 이래! ㅋ
2018년 5월까지 넉넉하게 계속 전시한대고, 입장료는 입장료는 10,000원이다.
혜원전신첩이 총 30점인줄 이번에 처음 알았다. ㅎㅎ
혜원 전신첩에서 특히 유명한 <단오풍정> <쌍검대무> 같은 그림 속 의상을 고급지게 만들어 마네킹에 입혀 전시해놓았는데.. 사진으로 보니 좀 섬뜩하지만 ㅋㅋ 실제로 볼 땐 캬... 한복이며 옷감 예쁘다고 그 앞에서 침을 흘렸다.
신윤복의 그림 속 주인공들을 모두 모아 한편의 애니메이션처럼(고흐의 작품들로 만든 <러빙 벤센트>랑 비슷하다고나 할까) 이야기를 꾸몄고, 쌍검대무의 무희들은 특별히 따로 춤추는 장면이 나타났다. 혜원 전신첩 중에서 <쌍검대무>를 특히 좋아하는 편이고 그림에서 바람이 슝슝 나오는 것 같다고 늘 생각했었는데 그 느낌을 동영상으로 보니 또 나름 좋더라.
단점이라면... 영상 화면이 나오는 벽이 너무 길어서 한눈에 볼 수가 없다는 아쉬움이;; ㅠ.ㅠ 당연히 내 실력 탓이지만 동영상도 잘 담아내지 못했다. (그나저나 나 여기 동영상 직접 올리는 건 처음인가 보다! 이런 기능 있는줄 왜 몰랐지? ㅋ)
겸재 정선은 서른여섯 살엔가 처음 근처 현감으로 부임한 친구 이병연의 초청으로 금강산 구경을 하고는 그때부터 70대가 될 때까지 여러번 금강산 그림을 그렸는데, 연도별로 점점 더 호방하고 세련되게 숙련된 필치로 발전해나가는 그림체의 느낌이 확연히 보인다. 초심자땐 누구나 그저 눈에 보이는대로만, 원본에 집착하게 되는데 나중에 노련해지면 최선의 아름다움을 구현하느라 생략의 묘미도 막 부리고 그런 거지...
암튼 금강산 그림들이 담긴 겸재의 전신첩도 멋드러졌으나 사진엔 그 맛이 하나도 담기지 않아 죄다 삭제해버렸다.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한 점 선보이자면...
<해악전신첩>에 든 '내금강산도'일 거다
이 금강산 봉우리 사이사이에 현대적인 도시를 접목시켜 반짝반짝 빛을 내는 디지털 작품은 이런 느낌이다.
위 그림에선 케이블카가 지나가고, 아래 그림에선 잘 찾아보면 남산타워, 에펠타워도 있으며 9분인가 7분인가 작품이 상영되는 동안 불꽃놀이도 벌어지고 그런다.
금강산의 4계절의 변화 모습도 있던데 그건 좀 너무 속도가 드려서 답답한 느낌이라 빨리감기 버튼이 어디 있으면 막 누르고 싶었었다. ㅎㅎ
금강산 <총석정>은 금강산 앞바다에 있는 주상절리 '총석' 꼭대기에 세워진 정자 이름이다. 지금은 어떤 모습일지 너무도 궁금한 총석정 그림을 희정당 벽화로도 보고 겸재 그림으로도 보고... 평창 올림픽엔 북한 선수들이 오고... 언젠가는 정말 금강산 총석정 구경을 나도 할 수 있을까? ㅎ
둘의 느낌이 비슷한가? ^^;;
아래는 맨 마지막 전시실 디지털 작품인데... 기다란 벽 화면에 화려한 꽃들과 풍경이 눈부시게 연이어 펼쳐진다. 한참을 구경하며 핸드폰으로 찍으려고 이리저리 애를 써도 색감이 죄다 날아가버려 포기하고 아쉬워하며 뒤를 돌았더니 뒤쪽 거울에 비친 화면이 오히려 더 선명하게 보였다. 옳타구나 찍어오긴 했는데 이제보니 내 실루엣을 확 오려버리고 싶다. +_+
말도 안되는 혹한에 며칠째 두문불출하다 게으름 떨치고 나간 외출이라 특히 보람있고 좋았다. 이날 동대문에 간 바람에 드디어 자수실과 브로치 재료도 사왔다. (곧 자수 포스팅이 이어진다는 예고다. ㅋ)
해마다 거의 그렇지만 2018년이라는 말이 제대로 입에 붙으려면 설날은 지나야하는 것 같다. 기분상으로도 아직은 새해가 아니고 '헌 해'인 것 같달까. 1월 1일에 떡국은 끓여먹었지만 어거지로 더 먹은 나이도 아직은 인정 못하겠고...
암튼 그래서 올 한해는 어떻게 지내야 행복할까 고민하며, 부질없든 말든 이런저런 소망들을 적어본다. 여기저기 소문내고 기록해두어서 그 '말의 힘'으로라도 많이 이루어지면 좋지 아니할까. 자꾸만 맥떨어져선 쓸데없는 회상에 젖어 미련이나 떨고 그러지 말고 이제 좀 앞으로 전진...하고 싶다.
1. 베트남에 나가 있는 친구네 놀러가기 (마음 같아선 한 2, 3주 가서 얹혀 지내며 놀고 싶지만 에효.. 불가능하겠지. 북쪽 지방 트레킹도 가려면 현재로선 너무 더워지기 전인 4월을 노리고 있으나 과연;; )
2. 무릎 잘 고쳐서 등산 열심히 다니기 (그러려면 남들 잘 때 자는 생활습관부터 길들여야할 듯;; ㅠ.ㅠ) & 서울 둘레길 남은 스탬프 다 찍고 완주 배지 받기
5. 새 취미생활 시작 - 프랑스 자수 (자수책과 자수틀과 천 구입 완료. 실과 바늘, 브로치 재료만 사면 됨 ^^;)
6. 전시회 많이 다니기 (작년엔 기대 전시 적어놓고도 거의 다 놓쳤음)
7. 휴대폰 개비? (액정이 깨지고 배터리게이트 탓에 느무느무 속터지게 느려진 아이폰6를 바꾸긴 바꿔야할텐데 애플은 밉상이고 삼성은 더 밉상이고 LG는 안예쁜데다 요번에 엄마 핸드폰 보니 기본앱들이 너무 흉하다. 아이튠즈에 들어 있는 음악 때문에라도 또 아이폰을 사게 되려나... 아 몰랑)
하여 일단 2018 기대 전시목록부터 적어놓으련다. 12월부터 적어놓은 목록 중엔 벌써 끝난 것들도 있다.ㅜㅜ
디 아트 오브 더 브릭: 아라아트센터 ~2/4까지
소화:짤막한 이야기 - 서울미술관 ~2/7까지
님을 위한 바다: K현대미술관 ~2/11까지
퀸틴 블레이크 일러스트 원화전: 상상마당 ~2/20까지
지브리 대박람회: 세종문화회관 ~3/2까지
플라스틱 판타스틱: D뮤지엄 ~3/4까지
자코메티 특별전: 한가람미술관 ~3/11까지
마리로랑생 전: 한가람 ~3/11까지
신여성 도착하다: 덕수궁 현대미술관 ~4/1까지
Paper, Present 너를 위한 선물: 대림미술관 ~5/27까지
강요배: 학고재갤러리 5-6월 예정
내가 사랑한 미술관 근대의 걸작: 덕수궁 현대미술관 5-10월 예정
조선지도 500년 공간, 시간, 인간의 위대한 기록: 국립중앙박물관 6/19~9/2
니키 드 생팔: 한가람 6/30~9/25
조선민화걸작전: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7/5~8/26
제국의 황혼, 근대의 여명: 근대전환기궁중회화 - 덕수궁미술관 11/7~2019 2월
마르셀 뒤샹: 국밉현대미술관 서울관 12월~2019 4월
전시목록을 열심히 적다보니 책도 좀 읽으시지.. 하는 마음이 드네그려. 책은 결심 같은 거 안하고도 좀 많이 읽으면 안되겠니. 흠.
미국 여행기를 연말안에 끝내겠다는 목표를 겨우겨우 달성한 뒤엔 곧이어 2017 베스트 포스팅을 하고 싶었지만 감기몸살로 계속 빌빌댔다. 그나마 다행히 A형 독감은 아니어서 열은 오르지 않았고, 그냥 팔다리 손가락 마디마디까지 쑤시고 아프고 눈과 코에서 뜨거운 바람이 슝슝 나오더니 콧물이 쏟아졌다. 사나흘 앓고 일어나 이제 좀 살만 한데, 아직은 머리가 멍해서 책도 안 읽히고 그래서 일도 못하겠고 꼼지락 꼼지락 쓸데없는 바느질을 좀 하다가 블로그 정리나 하자 싶어졌다.
일단 2017년 정리 포스팅을 다 해야, 나의 모든 유희와 여행 기록을 메모해 놓은 탁상 달력을 내다버릴 수 있다규~ ㅋㅋ
2017년에 읽은 책
1. 캐롤 ---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김미정 옮김/그책(2016)
2. 노르웨이의 숲 ---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양억관 옮김/민음사(2016 리미티드에디션)
3. 5분 카페 스케치 --- 김충원 지음/진선아트북(2016)
4. 이것 좋아 저것 싫어 --- 사노 요코 지음/이지수 옮김/마음 산책(2017)
5. 죽는 게 뭐라고 --- 사노 요코 지음/이지수 옮김/마음산책(2015)
6. 아니라고 말하는 게 뭐가 어때서 --- 사노 요코 지음/전경아 옮김/을유문화사(2017)
7. 레베카 --- 대프니 듀 모리에 지음/이상원 옮김/현대문학(2013)
8. 책이 입은 옷 --- 줌파 라히리 지음/이승수 옮김/마음산책(2017)
9. 처음 만나는 프랑스 자수 --- 박성희 지음/티나(2016)
동화로 만나는 프랑스 자수 -- - 박성희 지음/티나(2017)
히구치 유미코의 자수 12개월 --- 히구치 유미코 지음/황선영 옮김/이아소(2016)
10. 시녀 이야기 ---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김선형 옮김/황금가지(2017 특별판)
<캐롤>은 16년에 본 영화와 원작이 어떻게 다른가 궁금해서 올해의 첫 책으로 읽었다. 영화는 영화대로, 책은 책대로 좋았고, 책속에선 테레즈가 사진작가가 아니라 무대 디자이너라는 점도 신선했다. 루니 마라의 테레즈도 좋았지만, 책에선 주인공이 겨우 풋풋한 스무살, 스물한살이었다는 게 인상 깊었다. 난생 처음 만난 사랑이 캐롤이었다니 축복이다. 인상 깊은 구절을 적어놓은 독서 노트에서 "두려워 하면서 사랑하는 게 가능할까? 테레즈는 생각했다. 두려움과 사랑, 이 두 가지는 양립할 수 없다"(p331)는 글귀가 새삼 가슴에 박힌다.
무라카미 하루키 책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었다. 몇번 시도하다가 뭔지 모르게 불편한 느낌의 글이었던 막연한 인상과 최근 들어 어마어마하게 높아진 선인세에 괜히 배알이 틀렸던 것 같다. 근데 어느날 비틀즈의 Norwegian Wood를 듣는데, 문득 이 음악에 영감을 받아 썼다는 하루키의 작품이 궁금해졌다. 예전엔 <상실의 시대>로 출간되었다던가. 마침 아삼삼한 느낌의 트레이싱페이퍼 커버를 씌운 리미티드 에디션이 나왔다고 알라딘에서 홍보 메일도 날아왔겠다... 그래 한번 읽어주지 하며 구입했던 거다. 내가 왜 하루키를 불편해했는지 그 남성중심적 글쓰기의 실체를 파악할 수도 있었고, 좀 더 어려서 읽었더라면 어떤 느낌이었을까 싶기도 했다. 암튼 뭐 나랑은 별로 안 맞는 작가라고 결론 내림.
사노 요코의 책을 세권이나 읽은 건... ㅠ.ㅠ 내가 이 '일본 할매'랑 말하는 것과 생각하는 게 비슷하다며 읽어보라고 권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좀처럼 속내를 알 수 없는 그에게 비친 내 인상과 생각이 어떤지 궁금했다. 평소 내가 "죽는 건 하나도 안 무서워! 근데 죽도록 아픈 건 무서워..."라고 했던 말과 일맥 상통하는 말들이 확실히 책에 담겨 있었고, 그 밖에도 이거 내가 한 말 아냐? 싶은 구절들을 발견했다. "나는 인사치레를 못한다. 인사치레를 하려들면 입이 썪는 것 같다. 그러니 내가 하는 칭찬은 진심이다."(<죽는 게 뭐라고> p62) "나는 돈이 없을 때에도 돈을 잘 쓰는 게 자랑이다."(<죽는 게 뭐라고> p135) ^^; 당연히 이 작가와 나는 다른 점도 많았지만... 그 사람이 대체로 나를 제대로 파악한 게 맞다고 생각했다.
대프니 듀 모리에의 책을 작업하면서 작품에 홀딱 반해가지고, 출판사에서 보내준 시리즈의 책 중 <레베카>를 틈틈이 읽었다. ㄹㅇㅊ 이 더 매력적인 주인공이었고 작품도 더 좋았던 것 같다. 아무레도 <레베카>는 어린 시절 흑백영화로 보았던 히치콕 감독의 영화 장면들이 뇌리에 깊이 박혀 편견으로 작용했다. 길쭉하고 비스듬한 대문자 R만 보아도 섬뜩했던 느낌이 아직도 남은 걸 보면 영화를 꽤 여러번 보았나? ㅎㅎ
9번 자수책은 '읽었다'라고 하기엔 민망한 책이라 세권을 하나로 쳤다. 후배가 편집 작업에 참여한 자수책 증정본을 줬는데, 작은 브로치 같은 소품 자수들이 너무도 예뻐서 스케치 취미생활은 완전 내팽개치고 자수 욕심에 불탔다. 결국 또 다른 자수책까지 사들이고는 천과 수틀까지 마련... 원하는 색깔의 실만 사들이면 또 맨날 바느질이나 하고 있을 확률이 높아서 아직 실과 바늘은 구입 안하고 있음 ;-p
<시녀 이야기>는 2017년에 읽은 마지막 책이었다. 마거릿 애트우드가 노벨문학상을 받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품고 있었다가 가즈오 이시구로가 받게 되면서 그럴 만 하다 느끼는 한편 나 홀로 애트우드에 대한 존경심을 독서로 표할 작정(?뭐래.. ㅋ)이었다. 작금의 현실을 파헤친 것 같은 섬뜩하고 예리한 작품을 이미 20년 전에 썼다니(원작은 98년 출간인듯;) 참 대단하다.
부끄러울 만큼 ㅠ.ㅠ 워낙 독서량이 적어서 올해의 책 베스트 3권은 어렵지 않게 골랐다. 죄다 여성 작가가 쓴 소설이란 공통점을 지금 발견했다. ㅎㅎ
2017년에 본 영화
1. 너의 이름은
2. 언어의 정원
3. 초속 5센티미터
4. 시간을 달리는 소녀
5. 라라랜드
6. 가장 따뜻한 색, 블루
7.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8. 무현, 두 도시 이야기
9. 모아나
10. 라이언
11. 덕혜
12. 로그원: 스타워즈 스토리
13. 히든 피겨스
14. 공조
15.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
16. 죽여주는 여자
17. 공모자들
18. 지니어스
19. 파리로 가는 길
20. 라푼젤
21. 신데렐라
22. 커피 한 잔이 섹스에 미치는 영향
23. 아가씨
24. 썸머타임: 아름다운 두 계절
25. 은밀한 가족
26. 여교사
27. 더 셰프
28. 호프 스프링즈
29. 페어웰, 마이 퀸
30. 아담
31. 미쓰 와이프
32. 옥자
33.아이 캔 스피크
34. 맨체스터 바이더씨
35. 메리와 마녀의 꽃
36. 꾼
진하게 표시한 영화만 영화관에 가서 봤고, 나머지는 비행기에서 봤거나 죄다 휴대폰으로, 아니면 컴퓨터로 다운 받아 본 영화다. 휴대폰의 작은 화면으로 봐서 그런가...어떤 영화는 제목을 봐도 내용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것도 있다. ㅠ.ㅠ 달력엔 분명 그 옆에 별점 표시도 해놨던데 ㅎㅎㅎ 내 머릿속의 지우개가 요즘 너무도 활발하다.
2017년엔 퀴어 영화를 꽤 본 것 같다. 퀴어 인물도 남녀 감독이 참 얼마나 다르게 그려내는지... 상업성을 추구하기 때문이겠지만, 불편한 시선과 묘사가 좀 거슬린다 싶으면 역시나 남자 감독이었다.
암튼 심히 가물거리는 기억을 더듬어 꼽은 올해의 베스트 영화 3는...
개봉일과 상관없이 내가 본 순서대로 뽑고보니 또 다 소수자 여성들이 주인공이다. 특히 <죽여주는 여자>엔 소외된 약자들만 등장한다. 성매매 여성, 장애인, 트랜스젠더, 그리고 병든 노인. 쉬쉬하는 노년의 성과 빈곤 문제, 어떻게 늙을 것인가, 늙어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현실감 있게 다뤘고, 그래서 오래오래 기억에 남았다. <히든 피겨스>는 유쾌하고 잘 만들어진 영화였지만, 그들이 미국 NASA에 들어갈 수 있고 인정받을 수 있었던 건 결국 지적으로 뛰어난 인재이고 최고 교육을 받았기 때문임을 생각하면 씁쓸하다. 실화인데도 판타지처럼 느껴진 이유는 우리나라만해도 아직 갈 길이 한참 멀었으니까? <아이 캔 스피크>의 나문희 할머니만 해도, 자기가 운영하는 수선가게를 지닌 소상공인이고, 영어회화 학원에 다닐 수 있을만큼 경제적으로 여유롭다. 여성들이 그나마 좀 힘을 쓰려면 배움과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당연한 일인데 현실과 겹쳐서 왜 슬픈지...
덧붙이자면 <재키> 비행기 안에서 보다 넘 지루해서 초반에 포기하고, 나탈리 포트만에 대한 애정으로 나중에 다시 시도했지만 역시나 끝내지 못했다. ㅎㅎ 책도 그렇고 영화도 그렇고 재미 없으면 이젠 끝까지 참아줄 의무가 없다고 생각하며 살기로 했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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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엔 세계의명화, 일요시네마 2 프로그램을 작업하며 모두 12편의 EBS 영화를 번역했었는데, 2017년엔 EBS에서 재방송하는 영화들도 워낙 많았고, 세계의명화만 일이 들어온 데다 나와 작업 스케줄이 잘 맞지 않아서 9월 2일 방영분까지 달랑 7편을 작업했다. 사진 편집 앱에서 포스터 안짤리는 8개짜리 프레임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12개짜리에 넣어 더 휑하다.
1/28 우주전쟁 2/9 로빈후드 2/26 터미널
6/17 제로법칙의 비밀 7/22 파앤드어웨이 8/12 굿윌헌팅 9/2 디파티드
맷 데이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로빈 윌리엄스, 키아라 나이틀리... 내가 좋아하는 배우들이 나오는 영화는 일단 나를 먼저 떠올려주는 프로덕션 PD님이 있어 기쁘다. 개인적으로 애정하는 영화인 <굿 윌 헌팅>을 번역하게 되서 어찌나 기뻤는지!(하지만 이 영화에 그토록 여혐 발언이 많은 줄은 정녕 미처 몰랐었다. ㅎㅎㅎ 할리우드가 어떤 곳인지 드러난 작금의 상황을 보아도 어휴...) <디파티드>는 홍콩영화 <무간도>를 리메이크한 영화라 개봉 때 보고싶었으나 놓쳤던 터라 쾌재를 부르며 작업했었다. 2018년에도 두달에 한편 정도는 작업하고 싶은데 과연 사정이 허락될지 모르겠음. (아직 의뢰가 없다 ㅠ.ㅠ)
2017년에 본 공연
1. 콜드플레이 내한공연(4/16)
2. 뮤지컬 나폴레옹(9/20) - 임태경, 정선아, 김수용, 박송권
콜드플레이 공연이야 더 말할 것도 없이 좋았고.. ㅠ.ㅠ <나폴레옹>은 왕비마마 모시고 가려고 여름부터 예약했다가 위약금까지 물고 취소하기를 2번이나 반복한 뒤에 겨우 관람성공해 감개무량했다. 아직은 와병중이라 위태위태했고, 아니나 다를까 공연에 집중 못하고 자꾸 나에게 말을 걸거나 몸을 움찔거려 옆자리 관객이 중간 쉬는 기간에 언짢은 불평을 했다. 에효... 보는 내내 엄마 때문에 긴장해서 뮤지컬에 대한 인상이나 감상보다 그날 조마조마했던 마음과 안도감이 더 떠오른다.
2017에 본 드라마 & 예능
1. 셜록 시즌4
2. (여전히) 도깨비
3. 비밀의 숲
4. 이번 생은 처음이라
5. 윤식당
6.효리네 민박
<셜록>은 그토록 고대했던 것에 비하면 좀 실망스러웠고... 꼬박 1년 전이라 정말로 아스라하다. 그치만 또 언제 나올지 모를 시즌5를 기다리겠지. <도깨비> 역시 1월에 끝이 난 드라마라 2016년 베스트에 넣었던 게 아닐까 생각할 정도였다. 마음에 안드는 구석이 없던 건 아니지만, 영상미며 스토리며 인정할 건 인정하자. 그에 반해 <비밀의 숲>은 그야말로 최고의 드라마! 한참 바쁠 때 본방중이라 스포일러를 최대한 피하며 아껴뒀다가 한편씩 두편씩 어쩔 땐 세편 내리 꼬박 밤새며 봤다. 으아.. 정말 대단한 흡입력과 완성도! <이번 생은 처음이라>는 중간에 몇편 보다가 결혼제도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와 대사들이 맘에 들어서 나중에 다시 몰아봤다. 중성적인 여자 이름을 좋아하는데 이 드라마엔 여주인공 이름이 지호, 남주인공 이름이 세희다. ^^; 뭔가 이런 미묘한 설정부터 좋아! 세희 역할의 이민기 배우를 새삼 다시 보게 됐고, 여주인공의 친구들 이야기도 각각 소홀하지 않게 잘 다루어져 좋았다.
<윤식당>은 오래오래 집을 떠나 여행자의 삶을 살고 싶다는 로망을 잠재우느라 헬렐레 즐거이 보았고(난 식당 종업원들 아니고 거기 나오는 외국인들에 감정이입해서 보는 재미가 좋았다), 이효리와 아이유를 다시 보게 되었던 <효리네 민박>도 제주도 로망과 함께 보고보고 또 보고 재방도 보고 그랬다. 제주도에서 살기 위해서라면 게스트하우스에 취직할까, 감귤농장에 취직을 할까, 뭐 그런 꿈을 아직도 못 버렸다. ^^;
2017년에 떠난 여행&답사
1. 미서부와 캐나다 빅토리아섬 (4월) --- 8개월만에 여행기를 마쳤으니 더 설명 않겠다. ^^
2. 서울 북촌 (6월) --- 관광객의 눈으로 서울 살기 프로젝트 1
북촌 한옥마을 여러번 가 봐서 다 안다고 생각했다가 오잉~ 하며 놀랐다. 종로구와 서울시에서 꽤나 많은 곳들을 새로 가꿔놓았더라. 엄청 예뻤다.
3. 양주 회암사지 & 장욱진 미술관 & 권율장군 묘 (6월 & 9월)
양주에서 문화해설사 하시는 지인분 덕분에 속속들이 구경하며 신이 났었다. 폐사지(유구만 남은 절터) 구경을 별로 많이 안해본 터라, 회암사지의 어마어마한 규모에 놀랐고, 박물관에도 볼거리가 많아 신기했다. +_+
거의 왕궁터 같았던 회암사지...
건축상도 받았다는 장욱진 미술관 구석구석 예쁘다
장욱진 미술관 옆 권율장군 묘에서 내려다보며이는 예쁜 한옥
4. 안면도(6월)
5. 곤지암 화담숲(7월)
6. 속초 동명항(8월)
6. 강화도(9월)
7. 외산 무량사 & 보령 성주사지 & 오천항 수영성(11월)
흐렸어도 무량사의 가을은 눈부셨다
나폴리 못지 않게 아름답다는 오천항
같은 날 오전과 오후 날씨가 이토록 다르다 ^^;
8. 수원 화성 행궁(12월)
행궁과 화성 성곽을 1바퀴 다 돌았는데.. 우와.. 너무 좋아서 봄날에 날씨 좋으면 한번 더 가고싶다는 얘기를 했다. <화성성역의궤>에 실린 그림과 설명이 너무도 정확해서 그대로 복원해 놓은 화성은 조선시대 건축이라는 게 신기할 정도로 이국적이었다. 터키에서 못 타본 열기구 선망 때문인지 제자리에서 올라갔다 내려오는 게 전부인 저 열기구(18,000원)라도 좀 타보고 싶었다. ㅋㅋ
9. 서울 둘레길 - 관광객의 눈으로 서울 살기 프로젝트 2
빠진 날이 많아서 함께했던 팀들의 공식 둘레길 순례는 끝났는데 난 미처 못 끝냈다. ㅠ.ㅠ 총 28개 스탬프 중 아직 7개를 더 찍어야함. 옛날 우체통을 재활용해 만들었다는 스탬프 보관소에서 각기 다른 모양의 스탬프를 찍는 재미가 ㅎㅎㅎ 은근 쏠쏠하다. 스탬프 상관없이 서울 둘레길을 이미 몇바퀴나 돌았다고 큰소리치시던 선배님들도 막상 스탬프북 없으면 말짱 꽝이라고 하자, 별것 아닌데 욕심난다며 결국 157km를 완주하고 완주증서를 받아내시던데... 난 뭐냐. 뭐든 시작은 잘해도 금방 싫증내고, 그렇다고 또 완전 포기도, 깔끔한 마무리도 잘 못하는 나의 미련떠는 성격이 여기도 반영된 것 같다. 남은 스탬프를 2018년 상반기에 다 찍고 완주기념 배지를 꼭 받으리! (새해 결심 중 하나다 ^^;)
하반기엔 거의 등산을 못다녀서 다시 등산 초보자의 폐활량과 몸이 되었음을 12월 북한산에서 실감했다. 몸이 어찌나 무겁던지! 2018년부터는 매달 두번씩 안빠지고 좀 다시 산에 다녀볼 작정이다. 같은 자세로 오래 앉아 있으면 자꾸 무릎이 아파서 등산도 앞으로 몇년이나 하겠나 싶은 심정. ㅠ.ㅠ
2017년 전시
1. 훈데르트 바서 - 세종문화회관 (포스팅도 했으니 생략)
2. 르누아르의 여인 - 덕수궁 미술관 (그저 그랬음)
3.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상설 전시 & 마티스와 디벤콘 특별전
4. 장욱진 미술관 탄생 100주년 특별전 (6월과 9월에 각기 다른 특별전을 두번이나 봤다)
5. 고궁박물관 창덕궁 희정당 벽화 - 지금도 전시중이고, 희정당에서 떼어 복원한 금강산 그림이 진짜로 볼만하다. 금강산 관광을 대체 왜 가나 싶었는데, 남북관계 복원돼 관광루트가 다시 뚫린다면 가보고싶어졌을 정도다.
2017년 기억될 사건
1. 중학교 자유학기제 수업
아무래도 출판과 번역은 사양길이고... 뭔가 더 재미난 일 없을까, 새로운 길을 모색해볼까 하는 심정으로 중학교 1학년들 자유학기제 수업을 한 학기 맡았다. 밤 새가며 수업자료 PPT 만들 때마다, ^^; 형편없이 적은 강사료를 받으며 다들 이짓을 왜하나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생기발랄 천진난만한 아이들과 만나는 시간이 한편 기대되고 즐거웠다. 중2병이 중1로 내려왔다고 해서 엄청 떨었는데, 그냥 귀여운 애들이었어! 물론 말 안듣고 떠들고 쿨쿨 자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애들의 그 팔딱팔딱한 기운을 전달받는 느낌이 짜릿했다. 다만.. 연기된 수능 일정에 밀려 방학날 오전까지 마지막 수업을 하고선 콜록거리는 애들한테 옮아온 감기로 연말연초를 빌빌대며 보내야했지만 말이다. 처음 한두 주 수업때만 해도, 내 다시는 이 짓 안한다! (물론 번역일의 소중함과 귀함을 새삼 깨달았다 ㅎㅎ) 라고 별렀지만, 한 학기를 다 지내고 난 뒤의 마음은 또 잘 모르겠다. ^__^
2. 후배 인터뷰 & 취업 특강 ㅠ.ㅠ
동아리 후배의 부탁에 가벼운 마음으로 인터뷰를 해줬는데 그게 일파만파 일이 커져서 결국엔 번역에 관심있는 후배들을 위해 취업특강도 하게 됐다. 어우... 번역 하고 싶은 애들이 아직도 있다는 게 반갑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하고... 7년도 남지 않은 2024년에 AI가 번역가를 대체할 거라는 옥스포드 대학교 보고서도 알려주고, 암울한 출판 전망도 들려주고... 번역은 영어 실력이 주가 아니란 얘기를 해주고 돌아왔다. 근데 뭐;; 어차피 힘든 대학생들의 취업... 번역가로 진입하는 거나 비슷하지 않을까 싶네.
3. 이별
나도 내 마음을 잘 모르겠고 이게 뭔가, 사귀는 건가, 썸인가, 아닌가 지지부진 고민하고, 아니 고민 자체를 거부하고 괜한 두려움에 대화와 감정을 회피하고.. 그러면서 어느 결엔가 뽀르르 달려가 만나고 그러면서 1년 넘게 이어져왔던 관계가 크리스마스에 끝났다. 서로 지향하는 미래가 다르다는 걸 알기 때문에 최대한 상처를 주지도, 받지도 않으려고 나름 배려했으나 결국 상처 없는 이별은 없다. 따져보니 무려 20년 만이라서 내가 서툰 탓도 있었겠고, 뭔가 되게 두렵고 어려웠다. 사랑과 두려움은 양립할 수 없다는데, 호감이 결국 사랑으로 이어질까봐, 혹은 사랑이 아닐까봐 겁이 났었다. 째뜬 끝까지 차마 묻지 못한 질문과 미련을 덮어 놓자니, 내상은 꽤 오래 갈 것 같다. 굳이 2017년을 정리하는 공간에 이 이야기를 적어두는 것은 혹시나 끝이 아니기를 바라는 나의 우유부단함을 정리해야 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난 왜 지나고 나서야 감정의 실체를 깨닫는 건지 모르겠다. 혹은 추억의 미화를 위해 과장하는 걸 수도 있겠지. 한숨. 몇번의 고비 이후, 나중에 후회하는 마음 없게 엄청 잘해주겠노라고 말해놓고, 결국엔 그러지 못했다. 그치만 아무리 잘해주었더라도, 끝이 난 마당에 후회 없는 관계는 없겠지. 행복하라고 그에게 말했지만 행복하면 괜히 억울할 것 같다. 일단 나는 좀 불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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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니 2017년은 참 많이 놀러다녔고, 출간이 미뤄져서 그렇지 번역 일도 꾸준히 꽤 많이 했다. 블로그질 할 시간과 정신 여유가 없었을 만도 하다. 나와는 상관 없는데도 충격으로 다가온 사람들의 죽음과 친구의 난치병 같은 것들 때문에 괜히 조바심이 나서 더 행복해지려고 안간힘을 썼던 것 같다. 소소한 낙과 순간의 기쁨보다는 자꾸 더 '쎄고 확실한' 행복을 바랄수록 불행해진다는 깨달음을 얻었으니 되었다.
다음날인 18일 화요일 아침. 6시 알람에 눈이 번쩍! 언니들(큰언니의 친구분도 한 명, 총 4명이 여행 일행이었음)은 8시까지 오기로 되어 있었으므로 얼른 씻고 소풍 준비하듯 친구는 달걀을 삶고(남편이 주말 농장에서 키우는 닭이 낳은 유기농 달걀이라면서) 전날 밤 미리 구워 잘라놓은 쥐포와 문어 다리(!)를 챙기고...그러는 사이 나는 치즈케이크 한조각과 커피로 아침을 먹었다.
친구가 차려준 첫 끼니이므로 기념촬영해야한다고 하니 민망하다고 깔깔 웃는 친구... 원래 아침 잘 안 먹지만, 여행 다닐 땐 삼시세끼 꼭 챙겨먹어야하는 의무감 같은 게 있다. 하루 24시간을 악착같이 활용하려면 체력보충부터 해야하기 때문일까?
이렇게 매일 고칼로리로 아침을 시작해 열흘 내내 삼시세끼+간식으로 충만한 삶을 산 결과는 역시나 빤한 것이어서, 나는 얼굴에 주름이 모두 펴질 정도로 빵빵하게 보름달처럼 부푼 얼굴로 귀국했었다. 체중도 3kg쯤 늘었었고...
어행에서 돌아온지 한달도 더 지난 지금 체중은 예전으로 돌아왔는데 빵빵한 얼굴은 왜 때문인지 아직 여전해서, 보는 사람들마다 '얼굴 좋아졌다'고들 한마디씩 한다. 여행가서 아주 좋았나보구나? 얼굴이 훤하다.. 등등..
그들의 선입견 탓인지, 진짜로 낯빛이 환해졌는지 그건 잘 모르겠고 암튼 동그란 얼굴이 심히 빵빵한 네모가 되어있는 건 사실이다. ^^;
그리하여 아침 8시 드디어 우린 첫 행선지인 샌프란시스코로 출발했다. 마침 SF MOMA에서 마티스 전시회를 하고 있더라면서 미술관 좋아하는 내 취향을 고려해 3시 티켓을 이미 사놓으셨다는 언니. 아싸~
중간에 들러 나름 염원이던 '인앤아웃 버거'로 점심을 때웠다. 햄버거 4개를 모두 세트로 시켜서 감자튀김은 다른 시뻘건 쟁반에 한가득 따로 나왔는데 으어.. 영 맛없어 보이게 사진에 나와서 삭제했다. +_+ 서부에 왔으니 인앤아웃버거는 먹어줘야한다는;; 가격대비 만족도는 역시나 최고가 아닌가 싶다. 배불러서 바삭바삭한 감자튀김 다 못먹고 나오는 게 어찌나 아쉽던지...
갈 길이 멀고 미술관 시간도 맞춰야해서 마음이 바빠, 진짜로 거의 10분만에 빨리 버거를 해치우고는 내쳐 샌프란시스코를 향해 달렸다.
몇년째 계속 가물고 산불나고 난리였던 캘리포니아는 주택마다 잔디밭도 없애고 돌이나 나무칩을 까는 걸 주정부에서 보조해줄 정도였단다. 매일 잔디밭에 주는 물값도 어마어마하려니와, 도저히 그렇게 낭비할 물이 없었다나.
근데 이상하게도 올해는 비가 많이 와서 고속도로 양쪽에 늘 황량하고 누렇기만 하던 언덕에 풀이 돋고 꽃이 피었다는 뉴스가 나왔다면서, 그 또한 우리의 여행을 위한 하늘의 선물이라고 우리끼리 키득거렸다. 캘리포니아 북쪽은 몰라도 남가주엔 절대 없던 일이라나 뭐라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Courtyard Marriott Hotel에 체크인을 하자마자 짐가방만 방에 덜렁 집어던져놓고선...(나 메리엇 호텔에 묵었어! 감동할 새도 없이ㅋㅋ)부리나게 근처에 있는 SF MOMA로 걸어갔다.
마티스 단독 전시가 아니라, 마티스의 작품에 엄청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디벤콘'이라는 미국 화가와 합동 전시.
한국에서 대형 기획 전시 관람료가 막 만오천원씩으로 올라 불만이 많았으므로, 미쿡에선 대체 이런 특별전 티켓을 얼마 받나 슬쩍 인터넷 예약증을 살펴보니 무려 31불.. +_+
상설전시만 보는 것도 25불이었다. 흠.. 우리나라가 엄청 비싼 게 아니었다.
그리고 전세계 미술관도 요즘 추세는 상설전시는 예전처럼 자유로이 사진촬영이 가능하지만 특별전은 사진을 못찍게 하는 듯. 마티스와 디벤콘 전시관에서는 하나도 사진을 못찍었다. 생각보다 내가 좋아하는 마티스 그림이 많이 없고, 디벤콘이라는 화가는 내게 완전 '듣보잡'이어서 약간 실망했지만 ^^;; SF MOMA의 건물 자체도 마음에 들고 상설전시된 그림들이 워낙 많아서 시간 빡빡한 게 안타까울 뿐이었다.
세로 사진 구색 맞추느라 막 본인사진도 방출. ㅋㅋ 내가 의식하지 않고 찍힌 뒷모습 사진 좋아한다고 했더니만 큰언니 친구가 어찌나 뒷모습사진을 많이 찍어주셨는지... (물론 앞모습도;;) 평소 내 자세가 얼마나 껄렁한지 많이 알게 되었다. ^^;;
암튼 칼더의 모빌 작품 넘 좋으다...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은 앤디 워홀 작품도 많고 상설전시 작품이 알찬데 5시 폐장에 맞춰 숨가쁘게 돌아보려니 어찌나 아쉽던지... 그래도 5시를 넘긴 후에도 거의 쫓겨나다시피 기념품 가게에 들러 우산도 장만했다. 짐 줄인다고 우산도 안 챙겨갔는데 캐나다에 가면 계속 비를 맞을 거라나 뭐라나... 마침 몇년 전 선물받은 우산도 잃어버렸겠다, 가느다란 핀스트라이프 들어간 분홍색 3단 자동우산을 골랐고, 며칠 아주 요긴하게 써먹었다.
미술관을 나와선 아직 저녁 먹기도 이르겠다... 유니온 스퀘어까지 걸어갔다. 주변에 막 명품 매장들이 즐비한 걸 보면 나름 관광명소인듯. 그치만 여기저기 어찌나 공사중인 곳이 많던지 소음에 귀가 멀 지경.
아니 5시 넘었는데 미쿡 사람들 왜 퇴근 안하고 아직까지 일하지? 신기했다. ^^; 엄청 오래전이긴 하지만... 뉴욕과 시카고 갔을 때 보면 건설노동자들도 5시에 칼퇴근하던데.
샌프란시스코의 명물인 전차를 또 안 찍을 순 없지... 여행자들인듯 마침 전차에 매달려 가는 사람들 발견해서 가까이서도 땡겨 찍고... (요번엔 전차 안탔음. 돌이켜 보니 샌프란시스코도 세번째 방문이었는데... 처음보다, 두번째가, 두번째보다 요번 세번째가 더 좋았던 것 같다.) .
여정 첫날의 저녁은 한식파인 나의 친구를 위해 (이미 점심때 먹은 햄버거 때문에 느글느글하다고 밥 먹고 싶다고 하심;;) 일식으로 정했다. 캘리포니아에 왔으니 제대로 된 캘리포니아롤도 먹고 스시도 먹자면서...
가운데 둥근 그릇에 든 2개의 메뉴는...
왼쪽은 그냥 참치회(연어회였던 것 같기도 하고 ㅠ.ㅠ..) 오른쪽은 일종의 회덮밥이다.
큰언니(앞으로 E언니라고 하겠다;;)가 미국 맛집/쇼핑 평가 앱인 YELP의 신봉자여서, 우리가 갈 모든 음식점을 이 앱으로 검색해 별점과 후기를 꼼꼼히 따져 골랐다.
TACO BAR라는 이 집도 근방에서 엄청 유명한 집인지,바에서 맥주 마시며 30분쯤 기다렸다가 간신히 테이블에 안내되었는데 우리 빼곤 죄다 서양인들이었고... 우리가 2인분으로 시킨 롤을 옆에 앉은 이십대 여자앤 혼자 다 먹더라. ㅎㅎㅎ 암튼 회 싱싱하고 푸짐하고 맛있어서 좋았다!
해가 지면서 LA와는 딴판으로 쌀쌀해지는 날씨에 놀란 우리는 밤이라 어차피 커피도 못 마시는데, 다들 술도 안 즐기는 터라 부른 배를 꺼뜨리겠다고 일부러 한두 블록 돌아가긴 했어도 일찌감치 호텔로 들어갔다.
카디건을 걸치고도 으어 추워... 호들갑을 떨며 호텔에 들어갔는데 로비 한쪽 옆으로 안뜰이라고 할지, 중정이라고 해야할지 건물 중간에 저렇게 모닥불 느낌으로 불을 지펴놓았더라. 가서 불쬐자며 쪼르륵 달려나갔는데... 가스로 만든 불이라 가스냄새 나서 사진만 찍고 얼른 퇴장했다.
우리만 예민한 건지, 물론 저 주변엔 소파나 안락의자에 앉아 신문이나 책 읽는 사람들 꽤 많았다. 암튼 이렇게 여정의 첫날이 저물었다.
볼까말까 망설이다가, 상설 전시중인 천경자 전시실이 어떻게 바뀌었나 궁금하기도 하고 시립미술관 건물 자체를 좋아하니깐 뭐 그냥 보러가자 결심했었는데, 문화가 있는 수요일이라 반액할인 받지 않았더라면 본전 아까워했을 것 같다. +_+
어떻게 그나마 내 눈에도 좀 익고 좋아라하는 르누아르 그림은 단 한점도 없는지 원. ㅋㅋ
물론 르누아르가 그린 어여쁜 소녀들의 아름다움과 화사함을 보는 기쁨은 더러 있었지만, 마지막에 한 방에 몰아놓은 여체 그림들도 그저 그랬고 (모델 몸매를 너무 심히 보정해놓은 광고 사진을 보는 기분이라고 해야할까나;;) 전체적으로 우와.. 그림 실컷 봤다.. 싶은 충족감이 덜했던 것 같다.
입장료는 13000원. 입장료만 놓고 보면 꽤나 야심찬 기획전인데 글쎄. +_+
그래도 전시 보러 갈 때마다 혼자 끙끙대는 놀이, 그림 한 점 가져간다면 뭘 가져가야하나 2, 3층 전시실을 유심히 2바퀴 돌며 괜한 고민에 빠졌고 두 작품 중 고민하다 어렵사리 하나를 골랐다. ㅋ
르누아르, 장미꽃을 꽃은 금발 여인
르누아르, 고양이를 안고 있는 여인
나의 선택은 왼쪽! 이유는? 오른쪽 그림도 예뻐서 좋았으나 고양이가 좀 무서워서.. ㅋ
그래도 요번 전시를 보며 르누아르와 내가 멋진 미술작품에 대한 관점이 똑같단 걸 알게 됐다. 사진 촬영이 금지여서 벽에 적혀 있던 글귀를 기억하진 못하겠는데, 암튼 예술은 무조건 아름다워야한다는 게 요지였다(고 기억한다). 역시.. 르누아르가 모공 하나 안 보이는 말간 피부의 아름다운 여자들을 셀수없이 많이 그렸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군!
다른 때 같으면 집어온 브로셔를 책상에 세워놓고 몇달은 지켜보며 흐뭇해하는데, 색감이 하도 구려서 요번엔 그러지 않기로 했다. -_-; 포스터에 나온 저 그림의 해맑은 소녀 얼굴을 어찌나 우중충하게 만들어놓았던지. 아트숍에 깔려있는 전시 기념품들의 색감도 하나같이 원작과는 동떨어진 게 많았다. 이왕이면 장미꽃 금발여인의 모습이 담긴 걸로 뭐든 하나 골라보고 싶었으나 어우 숭해... 해서 결국 요번 전시에 포함되지도 않은 엉뚱한 뜨개질 소녀 그림이 우울하게 담긴 저렴한 비닐파일 하나 집어오는 걸로 쇼핑을 끝냈다.
오후부터 눈발이 날려서 미술관 가는 발걸음이 괜스레 설렜는데 금방 비로 바뀌더니만 문화가 있는 수요일이라고 뭔가 공연을 한다던 것도 아무 말 없이 취소되고, 전시는 약간 성에 안 차고, 뭔가 마구 아쉬워서 뒤풀이 치맥에 괜히 욕심 부리다 속병이 도졌던 게 더 기억에 남는다. 미술관 허세는 당분간 좀 참아야겠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