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엑스가 멀다는 핑계로 동대문에 오면 한번 가볼까 했던 유럽영화제는 결국 포기했다. 그 복잡한 동대문에 나간다는 게 꺼려진다는 핑계를 내세웠지만, 그저 다 귀찮았다는 게 본심이었다. 해서 유럽영화제까지 다녀와서 <10월에 본 영화> 따위의 제목으로 포스팅을 하려 했던 원래 계속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래도 잊기 전에 적어는 놓아야지 싶다.
한달에 한번씩 평일 오찬과 영화보기를 약속한 지인이 있다. 우유부단해서 좀체 뭐든 결정하기 어려워하는 나와 달리 만날 시간과 음식점, 보고픈 영화까지 콕 찍어주는 분이라 나는 그냥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는 점이 무척 흐뭇하기는 한데, 가끔 영화취향이 나와 맞질 않으면 어쩌나 염려되는 경우가 있다.
10월의 영화는 원래 <내사랑 내곁에>가 될 뻔했는데, 공교롭게도 만날 약속을 잡은 날 바로 전날에 끝이 나면서 다시 물망에 오른 <호우시절>과 <굿모닝 프레지던트> 가운데 선택된 영화는 후자였다. <호우시절> 쪽을 내심 바라고 있던 나는 약간 실망스러웠지만, 지인이 정우성보다는 장동건을 더 예뻐하나보다 여기며 그러마고 했다.
사실 둘 다 꼭 보고 싶은 영화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장동건은 얼굴이 연기를 깎아먹는 배우라고 흔히들 말하는데, <태극기 휘날리며> 말고 난 그의 영화를 본 적이 없어서 연기를 얼마나 잘하는지 그것도 잘 모르겠다. 이왕 잘생긴 남녀 얼굴 보는 재미를 따질 거라면, 장동건이 1/3만 나오는 이 영화보다는 정우성이 계속 말간 얼굴을 보여줄 <호우시절>이 낫겠다 싶었던 거다. 사실 <대통령>이라는 소재도 낯간지러웠으나, 그래도 장진 감독을 믿어보기로 하곤 마음을 비웠다.
영화를 볼 땐 몰랐는데, 집에 와서 보니 그날이 하필 개봉일이었대고 첫날부터 장동건 효과에 힘입어 꽤나 관객이 많이 들었다는 후문을 들었다. 개봉일 관람의 열혈관객에 나 또한 수를 보탰다니 킥킥 웃음이 났고, 이런 영화에 관객이 몰린다는 게 역설적으로 느껴져 좀 씁쓸하기도 했다.
어디선가 이 영화를 <판타지>라고 부르는 걸 봤는데, 그 말이 딱 맞다. 세 사람의 대통령 모습에서 누군가를 떠올리게 되는 상황이나 대사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 누구도 동일시할 만한 인물은 현실에 없다. 너무도 이상화된 대통령의 모습이랄까. 그래서 더욱 더 나는 오금이 저릴만큼 낯간지러움을 느꼈고 간간이 장진식 유머에 웃음이 나오긴 했지만 2시간을 넘기는 상영시간이 지루했다.
청와대 주방이라는 공간의 활용과 주방장의 내레이션은 좋은 아이디어였던 것 같은데, 역시 내가 즐기기엔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는 소재의 거부감이 너무 큰듯.
게다가 아무리 현실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설정이라지만, 요즘 신장이식 수술하는데 주사로 마취하는 병원이 어디 있나! 쳇...
하루하루 짧아지는 해길이며 으슬으슬 추워지는 날씨까지 가을을 실감하면서 계속 시름시름 맥이 빠졌다. 바삐 마무리해야 하는 일도 있기는 했지만 그와 별개로 삶이 너무 무미건조하고 재미가 없어 한숨만 푹푹 나오는 습관성 무기력증에 빠졌던 거다. 새콤달콤한 홍옥 사과를 와그작 깨물어 먹어보아도 잠깐의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고, 보고싶은 조카들과 통화를 해도 약발은 지속성이 없었다.
그러다 애써 TV에서 찾아낸 요즈음의 소소한 낙. 내가 퍽 단순한 인간임을 깨닫게 해준 고마운 소일거리라 널리 자랑하여 그 세를 넓히고자 한다. 홍옥의 진가를 널리 알려 더 많은 농가에서 내년에도 홍옥을 많이 재배해 새콤달콤 행복한 10월을 보낼 수 있기를 바라며 사방에 홍옥 타령을 해대고 있는 것처럼. ^^;
1. 지붕뚫고 하이킥
시트콤이라지만, 단순히 웃기는 에피소드 말고 가슴 찡한 이야기들이 참 많다. 이 시대와는 좀체 맞아떨어질 것 같지 않는 <식모살이>를 하고 있는 신애, 세경 자매의 사연도 기구하고, 만날 빽빽 소리를 쳐대서 짜증스러운 체육선생 오현경도 엄마 대신 동생들 건사하는 마음을 다룬 에피소드를 보노라면 또 가슴이 짠해진다.
다들 여기 나오는 못된 아이 <해리> 때문에 짜증을 내기도 하지만, 나는 해리로 나오는 이 꼬마가 <연애시대>에 나올 때 마음에 쏙 들었던 터라, 극악을 부리는 꼬마의 모습마저 놀라운 연기력으로만 비쳐 존경스러울 뿐이다. ^^
게다가 신애는 <고맙습니다>에 에이즈 걸린 아이로 나올 때부터 팬이다. 두 꼬마가 어찌나 연기를 잘하는지, 킬킬대다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서글픔을 함께 느끼며 공감하고 있다.
지다님이 눈여겨 보았다는 최다니엘도 볼만하지만 신애 남매의 키다리아저씨 노릇을 도맡은 줄리언도 멋지다. 황정음을 비롯해 그외 찌질함의 극치로 나오는 인물도, 이순재 김자옥 커플의 신세대 뺨치는 연애도 정겨운데, 늘 무시당하고 사는 남편 정보석의 캐릭터는 그 옛날 순풍 산부인과의 박영규 만큼이나 웃기면서 안쓰럽다. ㅋㅋ
매일 못챙겨볼 때도 많지만, 재방송으로 찾아보며 엔돌핀과 감수성의 분출을 경험하고 있다.
2. 천하무적 야구단
야구는 좋아하는 편이지만 오래 손놓았던 프로야구에 다시 집중하려니 구단 이름도 아리까리한 마당에 선수들 이름도 잘 모르겠고 골치가 좀 아팠는데, 토요일에 사고뭉치들이 야구를 시작하는 예능 프로그램이 방영을 시작했다. 첫방송부터 보진 않았지만,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 만나면 깔깔대며 끝까지 보게 될 정도로 중독성이 있다.
특히 야구의 o도 모르는 동네 건달들을 모아놓은 듯한 애들한테 야구를 가르치는 과정이 웬만한 다큐프로그램 못지 않게 흥미진진했다. 들짐승 캐릭터로 나오는 마르코 같은 애는 처음엔 정말 짜증났었는데, 동네야구 같은 이들 게임의 야구중계를 맡아 하다가 결국 감독직까지 수락한 김C(중고 시절 야구선수였다는 건 아는 사람은 알듯?)도 좋았고 체계적인 야구를 가르치기 위해 영입한 이경필 코치도 멋지다. 김준, 오지호, 동호 세 사람의 멋지고 잘생긴 얼굴 보는 재미도 있지만, 찌질한 이하늘, 김창렬, 임창정, 한민관 같은 이들이 나날이 발전하는 과정을 보면서도 감탄이 나온다. 최근엔 김성수, 조빈이 합류했는데, 나에겐 둘 다 비호감이었던 (김성수는 느끼하고 조빈은 또라이 같아서 +_+) 두 사람이 천하무적 야구단에 들어와 공 몇번 던지고 안타 몇번 날렸다고 단박에 호감쪽으로 바뀌더라. ㅋ
기본기가 전혀 없어 여전히 말도 안되는 실책을 밥먹듯이 해대며 도저히 야구 스코어라고 볼 수 없는 점수로 콜드게임패를 당하기 일쑤지만 이들이 첫승을 거두었던 날엔 나까지 울먹할 정도로 감동이었고, 하필 코리언시리즈 7차전과 같은 시간에 방송을 했던 지난주말엔 너무 조마조마해서 양쪽 채널을 오가며 야구를 보았는데, 기막히게도 천하무적 야구단과 기아는 둘 다 놀라운 대역전승을 기록했다. 정말 야구는 <모른다>! ^^;
3. 개그콘서트
개콘을 언제부터 열심히 챙겨보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막내동생네 조카녀석들이 따라하는 개콘의 유행어를 나도 공부해야되겠다 싶어 보기 시작했을 거다.
그간 개편이 되면서 <분장실의 강선생> 같은 빵 터지는 코너는 이미 사라졌지만 계속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는 개그콘서트를 보면서 일요일밤을 마무리해야 어쩐지 새로운 일주일을 활기차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들 만큼, 요즘 내 삶에 드물게 웃음을 주는 소중한 프로다.
간간이 마음에 안드는 코너도 있기는 하지만 (최근 시작한 <풀 옵션>인가 하는 몸개그는 출연진들이 너무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보기 안타깝다!) 황현희의 소비자고발 대신 시작한 <남보원> 코너는 요새 내가 제일 깔깔대는 물건이다. 강기갑 의원 분장을 하고 나온 박성호의 말투도 압권이고, <니 생일엔 명품가방, 내 생일엔 십자수냐!>고 외치거나 <기름값도 내가 낸다, 톨비는 니가 내라!> 따위의 구호를 목청껏 외칠 때면 내가 남성인권보장위원회 회원이 된 기분으로 속이 후련하다. ㅋㅋ
4. 미남이시네요
엄청난 물량과 배우를 투입한 <아이리스>가 승승장구하는 모양인데, 나는 거기 나오는 배우들이 하나같이 마음에 안들어서 도저히 볼 마음이 안든다. 그러던 차에 아는 분의 추천으로 보게 된 <미남이시네요>는 중학교때 몰래몰래 학교에서 하이틴 로맨스를 읽던 감질맛을 되살리는 기분이다. 장근석을 몹시 싫어하는 편이긴 하지만 ^^;; 나머지 박신혜, 정용화, 이홍기가 정말 귀엽고 사랑스럽다!
<후까시황>이라고 부르고픈 장근석 캐릭터는 여전히 마음에 안차지만, 홍자매의 드라마엔 확실히 삶과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느껴진다. 그리고 가끔 저렇게 알록달록 파스텔화 마냥 예쁜 화면이 등장하면 나도 모르게 헤벌쭉... 정말로 만화책을 옮겨놓은 듯한 황당한 장면은 물론이고 간간이 손발이 오그라드는 설정도 피할 수 없지만, 난 이미 <그까이거> 하면서 실실댈 수 있는 팬심을 품게 되었다. 이젠 수목 밤 10시가 기다려진다. 아웅.. 귀여운 고미남!
조기종영의 아픔을 겪은 <탐라는 도다>도 초반부의 닭살스러움을 극복하고 난 뒤엔 마냥 즐거워하며 봤었는데, 부디 <아이리스>의 물량공세 때문에 <미남이시네요>도 조기종영을 결정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늙다리 근육남들을 아무리 쏟아부어도, 극강미모 김태희의 연기가 아무리 늘었다고 해도 난 안볼 거란 말이닷~!
털갈이 모드에 접어든 듯 유달리 빠져대는 머리칼을 보면서 진즉부터 가을이라 생각은 했었고 아침저녁 보일러를 틀고 산지 꽤 됐으면서 정말로 얼마나 날이 서늘해졌는지는 실감하지 못하는 나날이었다. 장보러 잠깐씩 나가거나 왕비마마의 병원 보필 외출은 늘 낮이었기에 티셔츠 한장만 입어도 꽤나 더워 10월도 벌써 중순에 접어들었다는 건 날짜로만 인식했지 일기예보에서 말하는 최저기온이 얼마나 추운 건지 모르고 살았나 보다.
어제 간만에 밤외출을 하며 티셔츠 위에 나름대로 겉옷을 하나 더 입고 스카프까지 둘렀건만, 난데없는 비까지 쏟아진 날씨는 나의 예상을 한참 벗어난 <추위>였다. 그렇다고 계속 덜덜 떤 것도 아니었고 간혹 약간씩 한기를 느꼈을 뿐인데, 자고 일어나 보니 목이 부었다.
사실 약간의 콧물을 동반한 감기 기운은 꽤 오래 느끼고 있었는데 목까지 부으니 돌연 서글프다. 이젠 정말 추워지겠구나 싶어서. 생각해보니 가을 초입에 해야하는 옷장 서랍 바꾸기를 아직도 미뤄두고 있었다. 앞으로 입어야 할 계절 옷을 화장대 서랍으로 옮기고 여름옷은 장농 서랍으로 집어넣어야 하는데... 해마다 그 행사를 10월쯤 치른 것 같긴 한데, 올해는 게으름 부리다 특히 늦어진 모양이다.
털이 복슬거리는 두툼한 외투를 입은 사람들이 적잖은 거리에서 홀로 여름 장마 패션 같은 얇은 옷만 입고 돌아다니려니 뒷골이 더욱 서늘해지는 느낌. 마음도 스산한데 옷이라도 뜨뜻하게 입고 다녀야지 마음먹었다. 하지만 환절기엔 정말이지 옷을 어떻게 입어야할지 모르겠다. 변온동물화 되어가는지 조금만 더워도 못견디겠고 조금만 추워도 덜덜 떨리니 원.. 두툼한 스웨터를 껴입은 이들도 적지 않던데 벌써부터 그런 옷을 입고 실내에 들어가면 난 아마 땀을 벌벌 흘릴 거다.
칩거생활을 끝내고 슬슬 활동을 개시하려면 제대로 옷부터 꺼내입어야 하는데, 청소가 귀찮아 아직도 마루에 놓여있는 선풍기를 보자니 내 마음은 아직 여름을 보내기 싫어하는 건가 싶다. 어쨌거나 스산한 오늘은 대낮부터 보일러를 팍팍 돌리며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다. 이렇게 쓸쓸한 가을엔 지구와 환경을 염려할 마음의 여유가 안생긴다. 몸이라도 따뜻해 지고 싶단 말이지!
어쨌거나 새삼 깨달은 결론. 가을은 춥구나.
일주일 만에 장을 보러 갔더니 그새 홍옥이 나왔다! 빨리 홍옥을 사다먹을 욕심에 장을 보는 내내 조바심이 났다. 나의 식탐은 성격이 좀 오묘해서 고기와 생선류를 비롯한 음식에는 그저 뭉뚱그려 막연하게 <먹고 싶다>는 열망을 품는 반면에 과일류는 종류를 <콕 찝어서> 먹어야한다는 열망이 타오른다.
며칠 전부터는 그렇게 귤이 먹고 싶었다. 거의 매일 사과를 먹고 있던 터라 특히 비타민이 부족할 리도 없는데, 옛날처럼 한 박스 집에 쟁여놓고 손바닥 노래지도록 마냥 귤을 까먹고픈 욕망에 사로잡혔던 것. 요즘에 나오는 귤은 조생귤이라고 해서 껍질도 말랑말랑 좀 잘 까지겠나 말이다.
그래서 오늘은 장보러 가서 귤을 사와야지 마음을 먹었는데, 과일가게에 홍옥이 쌓여있는 걸 본 나는 광분해서 홍옥부터 잔뜩 담으라고 하고는 그래도 못내 아쉬워 귤도 한 보따리 사왔다. 모녀가 둘다 식탐도 많고 영양따져 골고루 먹어야하는 왕비마마 덕분에 우리집 엥겔계수가 좀 높은 편이기는 하지만, 대충 일주일치 과일값이 일주일치 식료품 금액의 4분의 1이다. 어휴... <잘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더라>며 먹는 것에는 절대 아끼는 법이 없는 나도, 카드로 결제하는 마트 비용은 그러려니 하는데 과일값을 현금으로 내려면 약간 손이 떨린다. 좀 전에 산 생선이며 채소 같은 반찬 가격과 대비하면 확실히 과일 값이 비싼 것 같아서...
하지만 집에 돌아와 얼른 홍옥을 씻어 와그작 깨물어 먹으니, 바로 이맛이다!
바야흐로 홍옥의 계절. 얼른 다 먹고 담주에 장보러 가면 또 사올 테닷!
일주일에 한두번은 체중계에 올라가 몸무게를 달아보면서 체중에 신경쓰지 않는다는 말은 모순일까 아닐까.
자신의 몸매와 체중에 가장 가혹한 판단을 내리는 사람들이 많지만, 나는 체중이 크게 늘거나 줄어드는 상황을 주시하는 것일 뿐 체중이 좀 늘어났다고 해서 다이어트를 하거나 더 살을 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먹는 것을 통제하여 몸을 혹사시키기엔 나의 식탐이 너무 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건강에 문제가 생기지만 않는다면 살집이 많든 적든 타인의 눈총과 손가락질과 자학의 원인이 되어선 안된다는 것이 나의 굳은 믿음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남녀불문하고 깡마르거나 울퉁불퉁 무서운 근육질로 뒤덮인 사람들보다는 몽실몽실 올록볼록 오통통한 사람이 더 좋다.
중년에도 군살 하나 없는 마돈나의 몸매를 우러러보기는 하지만 나에겐 그런 몸매를 추구할 여력과 에너지도 없거니와 그럴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다. 자랑스레 살집을 드러내는 비키니를 입지 않는 이유는 다만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 물론 마른 사람들은 살이 찌고 싶어도 안되는 것이라지만, 뼈가 앙상히 드러나는 가시 같은 몸매를 보면 안타깝고 가여워서 맛있는 걸 막 먹여주고 싶다. 멀대처럼 큰 키에 으스러질 것 같은 몸매로 휘청휘청 걸어다니는 모델들의 걸음걸이는 나에게 하나도 멋지지 않다!
어쨌거나 나이가 들면 근육의 양이 점점 줄어 지방으로 변하기 때문에 체중은 전혀 변화가 없더라도 근육에 비해 부피가 훨씬 큰 지방이 생겨나면 몸이 두루뭉수리하게 변할 수밖에 없단다. 반대로, 체중이 전혀 줄지 않았더라도 열심히 운동을 하여 몸의 지방을 근육으로 만들었다면 알게 모르게 여기저기 몸매가 매끈하게 정리되었을 확률이 높다.
운동이랍시곤 숨쉬기밖에 하는 게 없는 내 몸에도 근육이 남아날 리 없으니, 원래 신축성 뛰어난 밥배를 위하여 언제나 약간씩 넉넉하게 입던 옷들이 최근 들어선 죄다 꽉 맞는 느낌이다. 밑위가 짧은 바지를 입어 허리선 위로 솟아오른 뱃살의 두께도 확실히 몽실몽실 넉넉해졌다. 그렇다고 소스라치게 놀라 다이어트에 돌입할 위인은 절대로 아니다. 아마 맞는 바지가 하나도 안남으면 신나서 새옷을 장만하러 나갈 가능성이 더 클 거다.
명절연휴 동안 세 끼니에 더하여 간식까지 줄기차게 먹어대면 사실 2kg쯤 늘어나는 건 금방이다. 그나마 키가 작아서 그렇지 키가 큰 사람들은 명절 이틀 새 3kg도 쉬 불어난다. 기름진 음식을 갑자기 많이 먹어 두둑하게 몸에 저장됐기 때문인데 내 경우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몸도 알아서 저장해둔 살을 내놓아 일주일 안에 예전 체중으로 돌아간다. 명절에 늘어난 군살 같은 건 사실 걱정거리도 아니다.
오히려 심하게 몸살 같은 걸 앓고 나서 몸무게가 빠졌을 때가 문제다.
나에겐 내가 체감하는 적정 몸무게가 있다. 그 기준 아래로 내려가면 정말로 계단을 오르내리며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게 버거울 정도로 체력이 딸림을 느낀다. 그 기준보다 3kg이상 늘어나도 마찬가지다. 몸이 무거워서 거동이 불편함을 실감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내 몸은 본능적으로 적응에 나선다. 체중이 많이 빠졌을 땐 끊임없이 식탐과 식욕을 동원해 스스로 에너지를 저축한다. 내 손으로 집어 내 입으로 씹어 삼키기는 하지만, 사실 그럴 때 나는 몸이 시키는 대로 따를 뿐이다.
먹고 싶은 음식이 명확하게 머릿속에 떠오를 때, 나는 그것을 몸이 보낸 텔레파시라고 믿는다.
가령, 단 게 먹고싶어지면 스트레스가 쌓였거나 순식간에 분해되는 에너지원으로써 고열량 탄수화물이 몸에 필요하다는 뜻이다. 초콜릿 케이크가 떠오르면, 커피의 카페인과는 다른 초콜릿에 함유된 카페인과 달콤함이 몸에 절실하다는 의미다. 각별한 나의 식탐을 몸이 보내는 절실한 텔레파시로 해석한 세월이 꽤 오래 된 터라
계절에 따라 몸상태에 따라 내 몸이 원하는 먹을 거리들은 고도로 세분화되었다. 아니, 사회화 되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5월엔 주황색 알이 꽉 들어찬 꽃게찜이 먹고 싶고, 대하철엔 대하 소금구이가 먹고 싶으며
11월이 되면 싱싱한 굴에 방어회가 먹고 싶어지니, 철철이 달라지는 먹거리들을 머리 나쁜 내가 어떻게 익히고 있는지 참 놀라울 뿐이다. ^^
가뜩이나 나잇살이 오름을 느끼고 있는 데다 주말엔 뷔페식당에 가서 두끼 분량을 신나게 먹고 돌아왔더니 가차없이 소숫점 아래 두 자리까지 체중을 알려주는 디지털 체중계의 숫자는 실로 막강하다.
그렇지만 또 지금은 겨울이 아닌가. (아직 늦가을인가?)
올 겨울 추위를 무사히 나려면 동면 직전의 짐승들처럼 몸에 두툼한 지방층을 둘러놓아야 하는 법.
통통한 배를 두들기며 오늘은 커피에 데운 우유를 듬뿍 넣고 설탕까지 넣어 달달하고 그윽하게 한잔 마셔주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사람은 모름지기 먹어야 산다.
만일 늘어난 몸무게가 계속 유지된다면 나의 중년을 버틸 적정 몸무게가 그렇게 늘어났다는 뜻이라고 믿을란다. 20년 넘도록 크게 변하지 않은 몸무게의 변화 추이가 나도 궁금하다. ^^
원없이 한옥을 구경하고 너른 마당을 거닐고 싶다면 뭐니뭐니해도 궁궐 나들이가 최고다.
덤으로 단풍구경에 낙엽길 산책까지 욕심을 낸다면 가을에 창덕궁을 찾으면 된다.
걷는 걸 즐기지 않는데도 이상스레 나는 궁궐 나들이가 좋다.
이젠 문화재 보호를 위해 도시락 까먹고 돌아다니는 소풍이나 사생대회가 금지됐다지만
나는 중학교 3년 내내 거의 주말마다 경복궁으로 그림을 그리러 다녔고
어른이 된 뒤엔 계절에 따라 눈부시게 변하는 창덕궁과 후원 구경 다니는 것이 낙이었다.
일제때 훼손된 건물들을 복원하느라 창덕궁엘 가보면 늘 한구석은 공사중이었고
궁궐 관련 책을 보면 제대로 다시 짓지 않아 어느 문은 길과 틀어졌고 복원되어 깔린 어느 박석은 기계로 다듬어 인공미를 펄펄 풍긴다고 개탄을 해놓았지만, 그래도 나는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인정전이며, 대조전, 이름 까먹은 건물들을 이어놓은 회랑과 난간이 아름다운 복도를 이리저리 구경다니는 게 왜 그리 뿌듯하고 좋았는지.
궁궐 마당에만 들어서면 마음이 그윽하게 차오르는 것이 흐뭇하고 뿌듯해져 아무래도 전생에 궁궐에 사는 공주였나보다고 내가 중얼거리면, 일행들은 "공주가 아니라 궁녀였겠지!"라고 퉁박을 주기 일쑤지만 암튼 나는 창덕궁에 갈 때마다 후원이 우리집 뒤뜰이었으면 좋겠다는 허무맹랑한 꿈을 꾼다.
연두색 여린 잎과 꽃잔치가 벌어지는 봄도 예쁘고,
다양한 수종의 나무들이 각기 다른 빛깔로 옷을 갈아입는 가을도 아름답지만
새하얀 눈세상이 된 호젓한 궁궐 흙길에 발자국을 찍으며 다니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는 겨울 창덕궁도 까무라치게 멋지다.
암튼 작년엔 한번도 가보지 못한 창덕궁에 가고 싶어서 궁궐 단풍놀이 가자고 지인들을 꼬드겨 지난 화요일에 다녀왔다.
대장금 (아직도!) 영향으로 일본관광객이 많다는 얘긴 들은 것 같은데, 요샌 나 말고도 궁궐나들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는지 평일 오후인데도 한번에 들어가는 입장객이 엄청났다. 여나믄 명이 가이드를 따라다니며 설명 들을 때나 오붓하고 좋지, 백명 가까이 되는 인원이 한꺼번에 움직이려니 설명 듣는 건 아예 포기해야 할 정도고 사진을 찍는 것도 전각 구경도 마음에 찰 만큼 기회가 없었다.
추억이 미화되는 경향을 감안한다 해도 올해 창덕궁 후원의 단풍은 정말 보잘것 없었고(가물어서 전국적으로 올해 단풍이 예쁘질 않다더니, 물도 들기 전에 잎이 반이상 말라붙은 모습이었다)
1년 넘게 발길을 끊은 사이 전각들의 기와를 대거 새로이 얹고 단청 또한 죄다 새로 칠해놓는 바람에 너무 새것 같아 나에겐 마냥 아쉬웠다. 지금이라도 왕족들이 사는 것처럼 갈고 닦는다면야 좋긴 하겠지만, 인정전 내부에 걸린 왜식 전등이며 커튼은 새카맣게 때가 찌들었는데 바깥 단청만 화려하게 새로 칠하면 뭣하나. 그렇다고 단청이 죄다 벗겨진 초라한 모습을 바라는 건 아니지만, 모름지기 궁궐이란 수백년 세월의 무게를 적당히 간직한 모습이어야 격에 맞는 것 같다.
계속된 복원과 보호 때문인지 창덕궁은 갈 때마다 관람코스가 조금씩 달라진다.
몇해전까지만 해도 최근에 복원한 낙선재를 매번 보여주더니, 치사하게 낙선재는 특별관람 코스로 나뉘었고
후원 깊숙한 곳에 있는 옥류천도 특별관람으로나 볼 수 있었다. 인터넷 예약으로 날을 잡아야 하는 특별관람은 이미 인원이 다 차고 없어 우린 결국 3천원짜리 일반관람으로 만족해야 했는데, 2년만에 찾는 창덕궁은 그래도 좋았다.
나는 궁궐에서도 화려한 단청보다 문의 꽃무늬 살대, 기와지붕 옆면의 세모난 공간('합각'이라고 한다)의 장식이며 난간 같은 게 참 좋다. 구석구석 어쩜 저렇게도 소박한 아름다움을 깃들여놓았는지...
애련지와 애련정
몇해전 가을엔 3초마다 탄성이 나올만큼 아름다웠던 후원의 단풍은 애련지 주변에서나 조금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나마도 연못 근처라 나무에 물이 올랐기 때문일 것이라 짐작했는데, 확실하진 않다.
고운 가을단풍을 볼 수 있었다면 더 좋았겠다는 아쉬움은 있었지만, 후원은 그저 숲만으로도 아름답고 거기 어우러진 정자와 전각들은 보기만해도 뿌듯하다.
창덕궁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공간은 바로 후원 안에 자리잡은 부용지 주변이다.
부용지에 두 발을 담그고 있는 듯한 부용정도 아름답지만, 그와 마주보며 언덕에 서있는 주합루는 어쩜 그리도 우아하면서 위풍당당한지. 원래 2층으로 지은 한옥은 1층을 '각', 2층을 '누'라고 부르기 때문에 주합루는 엄밀히 2층만을 부르는 이름이다. 1층은 정조가 세운 그 유명한 '규장각'인데, 올라가볼 순 없었지만 위쪽은 단청을 새로 하지 않아 적당히 낡고 풍파를 이긴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부용지를 굽어보며 서있는 주합루
단아한 부용정
옥류천과 낙선재를 보지 못해 어쩐지 아쉬웠던 우리는 창덕궁을 나서 안국동으로 걷다가 내친김에 운현궁에도 들렀다. 다채로운 단청이 없어도 한옥이 그 자체로 얼마나 우아하고 당당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건물들을 실컷 구경하려니 반나절 내리 걸었어도 다리아픈 줄을 모르겠더라.
운현궁 같은 한옥에 사는 건 몇번 죽었다 깨나도 불가능하겠지만, 아무려나 이런 한옥에 산다면 매일매일 열심히 산책하며 마음을 닦을 수 있을 것만 같다. ㅠ.ㅠ
운현궁의 드넓은 마당에 둘러쳐진 저 아름다운 담장을 보라! +_+
짧은 궁궐 나들이가 아쉬워서 겨울에 눈이 내리면 같이 또 오자고 약속을 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나는 조만간 자유관람이 가능하다는 목요일에 날을 잡아서 마음껏 창덕궁 후원을 쏘다녀 봐야겠다는 생각이 사진을 올리면서 더욱 강해진다.
이왕이면 궁궐지킴이 같은 걸로 후원자도 되고 자원봉사를 해서 전각 안에 들어가는 영광도 누리고 싶지만, 워낙 청소하는 걸 싫어하니 매번 망설이다 포기하게 된다. 아쉬운 대로 철철이 궁궐 나들이나 하는 수밖에.
양머리의 실체를 공개하자면...
이렇다. ㅋㅋ
실로 부용정의 단아한 모습과 어울리는 공주의 자태라고 우기고 싶지만...
왕족이라기엔 너무 좋아라 헤벌쭉 웃고 있다.
가을은 우울증의 계절이기도 하다. 1년 가운데 자살율이 가장 높은 달이 11월이라는 이야기를 어느 책에선가 읽기도 했지만, 튼튼한 사람들도 계절이 바뀌고 따뜻함이 줄어드는 걸 견디기가 쉽지 않으니 마음이 불안정한 사람의 계절나기는 특히 어려운 게 당연할 것이다.
현대인의 30%가 우울증을 안고 살아간다는 통계도 본듯한데, 유명인의 자살과 함께 늘 언급되는 우울증 병력 때문에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져 이제는 이상한 <정신병>으로 취급받는 일이 드물어지긴 했어도 여전히 사람들은 우울증을 오해하거나 편견을 갖는 경우가 많다.
우울증을 오랜 지병으로 갖고 있는 가족의 존재 때문에 일찌감치 우울증에 대해서 이런저런 지식을 얻게 된 나도, 막상 현실에서 우울증 환자를 대할 땐 나도 모르게 실수를 저지른 뒤 나중에야 후회를 한다. 환자의 불안증세와 강박증이 본래 의중과는 상관없는, 순전히 병의 발현임을 알면서도 버럭 짜증을 내고 비난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게 되는 것이다. 병에 대해 제법 안다고 자부하는 나도 이럴진대 대부분의 무지한 사람들은 어떨지, 염려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울증에 대한 가장 잘못되고 뿌리 깊은 편견은 <개인적인 나약함>에서 생긴 병이며 <본인의 의지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러나 의지력만으로 극복될 수 있다면, 그것은 단순히 일시적으로 기분이 저조해지거나 맥이 빠진 것이지 병리학적인 우울증이라고 할 수 없다. 우울증은 여러가지 복합적인 원인이 한꺼번에 작용하여 생겨나는 <뇌의 질환>이기 때문에 개인적인 나약함과도 상관이 없다. 우울증 환자에게 반드시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라고 권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흔히 우울증을 <마음의 감기>라고 비유하는데, 감기에 걸려도 웬만해선 약을 먹지도 병원엘 가지도 않고 <그저 쉬면 낫는다>고 생각하는 내 입장에선 그다지 유용한 표현이 아니다. 우울증은 절대로 저절로 치유되지 않으며 혼자서는 결코 감당할 수 없는 <병>이라는 점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병리학적인 발병의 원인과 인체 시스템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크나큰 스트레스를 받거나 상실을 경험한 경우, 신체의 변화에서 비롯된 호르몬 이상, 또는 완벽주의자로서의 성격적인 요인 등 다양한 요소들이 한꺼번에 작용하면 복잡한 인간의 뇌에 드나드는 신경전달물질이나 호르몬에 이상이 생기게 되고 그렇게 생겨난 <뇌의 이상>은 약물치료를 병행하지 않으면 결코 건강하게 회복될 수 없다.
물론 우울증의 원인을 제공한 내외적 갈등이나 대인관계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심리치료만으로도 효과를 보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요인을 완벽하게 차단하는 것이 불가능한 경우가 대부분인 현대인의 우울증엔 약물치료와 심리치료가 병행되어야 예후가 좋으며, 그렇기 때문에 우울증 환자에겐 주변 사람들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다.
모든 병원이 다 마찬가지지만, 심리상담이 특성화된 일부 개인병원이 아닌 한 대형병원에서 정신과 진료를 받아보면 의사와 대면하는 시간은 길어야 10분이 고작이다. 예약환자로 버글거리는 대학병원 진료대기실에서 마냥 기다리다 주치의를 만나면 제일 먼저 엄마가 듣는 질문은 <어떻게 지내셨어요?>다.
30년 가까이 담당의사였던 주치의 선생님은 아마 우리 엄마와 몇 마디만 주고 받아도 어떤 상태인지 대강은 알아차릴 것이다. 똑같이 <잘 지냈어요>라는 대답에도 건강한 미소가 뒤따르는지, 억지웃음과 불안한 눈빛이 동반하는지 전문가로서 척 보면 간파되지 않을까. 어쨌든 내 믿음은 그렇다. 그리고 미심쩍은 부분은 보호자로 따라들어간 내가 부가적으로 질문하고 상담하면 되는 것이니까.
외국처럼 시간당 십만원 이상이나 하는 집중적이고도 개인적인 정신과 상담이나 심리치료가 활성화되지 않는 한, 내가 보기엔 우리나라에선 우울증환자의 치료에 주변 사람들이 맡아야할 몫이 상당히 클 수밖에 없다. 뇌의 활성물질 이상에 대한 치료약과 전반적인 심리분석의 결정은 당연히 전문의가 내려야하지만, 환자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과 따뜻한 배려, 치료를 포기하지 않도록 용기를 북돋아주는 일은 어디까지나 가족이나 지인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약물치료를 계속해서 받고 있는 상황임에도 우울증세가 심해질 때는 의사가 가장 중요하게 지표로 삼는 질문이 하나 있다. 환자 입에서 <죽고 싶다>는 말이 나오는지의 여부에 관한 것.
주치의 선생님에게 들은 바로는 자살의 약 45%가 우울증과 관련이 있으며 우울증 환자의 15%가 자살을 한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평범한 사람들이 일상에서 푸념하듯 <죽고 싶다>고 넋두리를 하는 것과 우울증 환자가 <죽고 싶다>고 하는 말을 똑같은 맥락으로 받아들여서는 절대로 안된다. 그리고 만약 환자의 입에서 <죽고 싶다>는 말이 나왔다면 가족과 지인들은 각별히 환자를 지켜보아야 하며, 장시간 환자 혼자 두어서도 안된다. 우리 엄마의 우울증이 심해져 주치의에게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어요>라는 말을 하는 단계에 이르면, 의사선생님은 나에게 신신당부를 한다. 어머니를 혼자 두지 말라고.
우울증을 앓던 유명인들의 자살 소식을 들을 때 내가 가장 안타까운 부분도 그 점이다. 주변에서 조금만 더 환자에게 신경을 써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 우울증 환자들이 얼마나 극단적인 생각과 충동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지, 이제는 부디 더 많은 사람들이 깨닫고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길 빌 뿐이다.
또한, 죽을 용기로 악착같이 살면 될 것을, 나약하기 때문에 죽음을 선택했다고 여기는 편견도 곤란하다.
우울증 환자들이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그 순간, 그 방법이 가장 쉽고 모든 이들의 행복과 문제해결을 위한 방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타인으로서 섣불리 그 깊은 고뇌와 아픔을 비난할 자격은 없지 않을까.
우울증에 관한 한, 전도라도 하듯 그 위험성을 기회 닿을 때마다 떠들고 다녔기 때문인지 내 주변엔 우울증을 앓았거나 극복했거나 현재도 앓고 있음을 내게 털어놓는 지인들이 꽤 되는데, 다행히 거의 완벽하게 병을 떨쳐내고 얼마전엔 2년 가까이 복용하던 항우울제도 끊을 수 있게 된 지인 한분의 경험담은 지금 생각해도 등골이 서늘하다.
갑자기 밀려든 무기력감과 극심한 불면, 불안감에 휩싸여 괴로워하면서도 아직은 병원을 찾을 엄두를 내지 못한 채 바깥세상과 스스로를 단절시키고 피폐해진 삶을 살던 한달여 동안, 그분은 끊임없이 죽음을 해결책으로 떠올렸다고 했다.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릴까, 문설주에 목을 매달까, 수면제를 사모을까 따위의 방법을 고민하고 연습까지 했다는 말을 한참 지난 나중에 들려주며 눈물짓던 그분의 모습에 얼마나 놀랬던지. 그분이 가족의 배려로 어렵사리 우울증을 극복하고 건강한 삶을 되찾을 수 있어서 정말 다행스럽다.
사실 우리 엄마도 몇년 전에 한번 홀로 안방에 들어가 수상한 시도를 한 적이 있을 정도였으니, 우울증 환자를 쉴새없이 지키고 돌보는 가족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다행인 것은 다른 여러 병처럼 우울증이 완치될 수 있다는 점이다. 증상이 없더라도 6개월 이상 꾸준히 약물치료를 해야 효과가 있으며 50-90%이상이 재발하기 때문에 더 오래 약물치료를 받아야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래도 완치율이 상당히 높다는 사실(80%라고 들은 것도 같은데 정확한 퍼센티지는 잊어먹었다 -_-;;)은 꽤나 고무적이다.
문제는 우울증이 도저히 완치되지 않고 약물치료를 수십년간 지속하는데도 재발하는 우리 엄마 같은 환자들일 것이다. 물론 처음엔 몇년에 한번 잠깐씩 우울증이 심해질 때만 약물치료를 했지만, 몇년이었던 발병주기는 점점 짧아졌고, 최근 10년간은 하루도 빠짐없이 약을 드시는데도 우울증의 증세가 까닭없이(명절이 다가온다든지, 도배라든지, 가족의 죽음이라든지 확실한 외적원인이 있을 때도 있지만) 심해져 평소 복용하던 약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어 입원을 해야할 때도 있다.
암을 치료하는 약이 개발되기도 했지만 아직도 감기를 치유할 약은 존재하지 않듯, 우울증에도 만사형통으로 특효인 약은 없는 듯하다. 너무도 복잡하고 신비로운 인체와 두뇌의 시스템 때문이겠지만, 항우울제는 사람마다 잘 맞는 약이 다르고, 심지어 같은 사람이라 해도 상황에 따라 약효가 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의 약물과 통원치료로는 도저히 일상을 유지하기가 어려운 경우, 의사는 환자에게 입원을 권유하기도 하고 환자 스스로 입원치료를 바라기도 한다. 대중매체에서 소비하고 재현하는 정신과 병동의 왜곡된 모습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편견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 대부분의 정신과 병동은 일반 병실과 마찬가지로 개방 병동이며 다른 환자들처럼 보호자나 개인이 고용한 간병인의 보살핌을 받는다. 다른 질병과 똑같이 의료진이 환자를 옆에서 관찰하며 수시로 맞는 약을 처방하고 증세의 호전 여부를 살피므로, 환자에게 잘 맞는 약물을 찾기 위해선 입원치료만큼 효과적인 방법이 없을 것이다.
계속 복용하던 항우울제가 있는데도 증상이 심해져 새로운 약을 찾아야하는 경우, 통원치료를 할 때는 기껏해야 일주일마다 약을 바꿔먹으며 병세를 호전시켜야하므로 몇주일이 걸릴지, 몇달이 걸릴지 알 수 없다. 입원을 해서 의사들이 집중적으로 약을 바꿔 치료를 시도해도 제대로 맞는 약을 찾기까지 일주일쯤 걸리는 일은 예사이기 때문이다. 결국 우울증으로 입원을 하는 경우, 맞는 약을 찾아내고 일상으로 되돌아갈 기력을 회복하고 다시 자기 삶에 적응하기까지, 우리 엄마의 경험을 돌이켜보면 최소한 한달 이상 걸렸던 듯하다. 심한 경우엔 두달도 될 수 있고...
어쨌든 중요한 것은 환자 본인이든 주변 가족이든 우울증의 치료를 미루거나 소홀하게 여기면 안된다는 점이다.
언젠가 별다른 이유 없이 또 다시 엄마의 우울증--사실 울 엄마는 단순 우울증이 아니라 조울증 환자다--이 심해져 몹시 괴로웠던 어느날, 진료실에 함께 들어갔던 내가 주치의 선생에게 도대체 왜 우리 엄마는 우울증이 완치되지 않는지 물은 적이 있다.
의사 선생님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글쎄요, 사람마다 통증을 느끼는 정도가 다 다릅니다. 손가락을 칼에 조금 베었을 때 어떤 사람은 대수롭지 않게 쓱 문지르고 마는 반면, 어떤 사람은 몹시 아파하며 눈물을 흘리고 괴로워하지요. 어머니는 사소한 상처도 심하게 앓는 쪽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런 성향이 어떻게 변하겠어요?
의사의 대답은 별 도움도 위안도 되지 않았지만, 심약한 엄마를 좀 더 이해하는 수밖에 없다는 체념을 일깨워주긴 했던 것 같다.
얼마 전, 엄마는 또다시 의사에게 왜 약을 30년도 넘게 먹는데 병이 낫질 않느냐고 따져 물었다. 복에 겨운 사람들이나 우울증을 앓는거라고 남들이 손가락질 하는 것 같아서 창피하다고.
의사 선생님은 이번에도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울증이 뭐가 어때서요? 그 사람들도 속으로는 다 앓습니다. 그냥 하도 싸워서 정든 오랜 친구겠거니 생각하고 우울증 약도 평생 데려간다 생각하세요.
엄마도 의사의 말에 딱히 위로를 받은 표정은 아니었지만, 당뇨병처럼 우울증도 친구처럼 평생 끼고가야 한다는 사실을 최소한 받아들이려고 노력할 작정인 듯했다.
30년 넘게 우울증을 앓아오신 엄마를 지켜보며 자란 나의 가장 커다란 두려움은 일종의 정신병인 우울증이 유전이어서 나도 우울증환자가 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점이었다. 그러나 우울증의 가족력이 위험인자가 될 순 있어도 유전은 되지 않는다는 말을 엄마의 주치의에게 확인하고 나서 나는 그 오랜 두려움을 깨끗이 접을 수 있었다. 잘은 모르지만, 엄마가 착하디 착한 성격이라 젊은 시절 남에겐 모진 말 못하고 속에만 화를 담아왔으며 자존심이 강해 고민이 있을 때에도 혼자서 끙끙 고민하며 해결하려는 경향이 많아 생긴 스트레스가 아마도 발병의 원인일 것이라고 짐작했던 나는 꽤 어려서부터 의도적으로 고민거리가 있으면 친한 지인들에게 주저없이 털어놓았고 거의 모든 나의 삶을 가족과 친구들에게 드러내고 나누는 것이 정신건강을 위해 좋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 블로그도 그렇게 시시콜콜 끝없이 늘어놓는 수다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만큼만, 아니 드러내도 좋을 것 같은 부분만 공유한다는 자기검열의 제한은 있겠지만 아무도 관심없을 것 같은 사적인 이야기들을 구구절절 기록하는 행위는 확실히 심리적인 치유의 효과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적인 블로그가 어떤 이들이겐 자기홍보와 자랑의 공간이겠지만, 나같은 이들에겐 확실히 익명을 활용한 고백과 배설의 공간이다.
이 공간에라도 간간이 우울하고 속상하다고 솔직한 넋두리를 털어놓는 한은 아마도 나의 뇌속에 이상한 호르몬이 생겨나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하는 순간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 믿을란다.
온종일 부대껴야 하는 두 모녀의 우울증 위험인자가 각별히 인지되던 어느 가을날,
한 여자는 돌연 우울증이 심해졌고, 한 여자는 우울증을 아는 대로 풀어 배설했다.
이어지는 가을타령.
가을이면 해마다 무슨 의식을 거행하는 것도 아닌데 소국을 사들인다.
처음엔 가을이 끝날 때까지 계속 소국을 즐기며 살리라 마음먹지만, 돌이켜보면 꽃을 사들이는 건 늘 10월쯤에 한번뿐이었던 것도 같다.
가을을 너무 쓸쓸하지 않게 보낼 수 있는 이유는 홍옥과 소국의 존재 때문이 아닐까 생각될 만큼, 작은 꽃병에 꽂아놓은 한움큼의 소국을 바라보며 새콤달콤한 홍옥의 보드라운 과육을 아삭아삭 통째로 깨물어 먹다가 앙상한 속씨 토막을 던져버리는 일은 내게 아주 큰 행복이다.
며칠 전 밤중 귀가길에 나를 기다렸다는 듯 리어카에 소담하게 꽂혀 있는 색색깔의 소국 가운데 어렵사리 노란 걸 골라 한다발 청했더니 아줌마는 물어보지도 않고 연보라색 소국 몇 줄기를 함께 싸주셨다.
올해도 어김없이 이어지는 삼천원의 행복은 넉넉한 아줌마 인심 덕분에 두 배로 누리게 됐다.
화려하지도 않고 달콤하지도 않은, 어쩐지 누리끼리한 향기가 나는 소국을 나눠 꽂아놓고는
게으름뱅이답지 않게 매일 물을 갈아준다.
이러면 이 작은 행복을 열흘은 이어갈 수 있지 않을까 소망하면서.
컴퓨터를 뒤져 꽃사진을 찾아보니, 해마다 사들인 소국을 해마다 사진으로 담아두는 촌스러움을 한번도 빠뜨린 적이 없었더라면 정말로 나만의 대단한 가을의식일 뻔 했다는 아쉬움이 들었다.
이제부터라도 촌스러운 전통을 만들어볼까 싶다.
첫눈에 반하는 사랑이 있다 하니, 드물게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마주쳐 불꽃을 튕기는 지극히 비현실적인 사랑의 시작도 가능하겠지만, 대부분 사랑의 시작은 짝사랑이 아닐까. 어느 한쪽에서 먼저 떨리는 가슴으로 셀레며 다가가 손을 내밀거나 지켜보기만 하는.
아무래도 가을이라는 특이한 절기와 요맘때 대책없이 밀려드는 쓸쓸함의 요인이 크게 작용했다는 혐의를 버릴 순 없지만 어쨌거나 이 가을 나는 뜬금없이 가망없는 짝사랑에 빠져들고 있다.
사람에게 빠져들 땐 딱히 이유를 댈 수도 없고, 이유를 댈 수가 없어야 진정 사랑이라는 말도 익히 들어왔으니 굳이 따져볼 필요도 없지만 심장이 딱딱해진 것이 거의 확실한 나에게 사랑을 일으키려면 우선 상대를 존경하는 마음이 생겨야한다고 오래 전부터 누누이 주장해온 터라 이 사랑이 무한한 존경심에서 비롯된 것은 분명하다.
자기 일에 대한 흔들림 없는 그의 신념, 고집, 박식함, 실력,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듯 독선적인 모습 뒤에 감추어진 인간애, 잔정이나 권력에도 휘둘리지 않고 매사에 공평무사한 정의로운 태도, 사회적인 나이 따위는 무시하는 듯한 천진함, 좌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에 더불어 빼어난 외모까지 갖춘 사람을 어떻게 존경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하지만 사람에 대한 존경심이 모두 사랑으로 이어질 수는 없는 법.
누굴 납득시킬 필요도 없는데 이렇게 구구절절 구차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한 마디로 말하면 그냥 난 그에게 홀딱 반한 거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흠모하기 시작하면 바보처럼 똑바로 잘 쳐다보지도 못하는 경향이 있는 나는 이번에도 눈이 부셔 제대로 볼 수 없는 태양을 바라보듯 나도 모르게 흘끔흘끔 훔쳐보듯 그를 대한다. 그러다 드물게 그의 미소라도 보게 되는 순간이면 얼굴이 막 달아오르는 것 같다. 뜨거워진 볼을 양손으로 진정시키며 누가 볼까 민망하단 생각이 들면서, 동시에 스스로 주책이란 느낌에 또 다시 얼굴이 붉어진다.
심지어 그는 나보다 나이도 어리고, 나로선 어째볼 수 없는 철옹벽 같은 강력한 라이벌이 곁에 존재한다. 그런데도 그저 이렇게 떨리는 가슴으로 홀로 애태우는 사랑이 행복하니 어쩌랴. 먼 발치에서든 가까이서든 기회 닿는 대로 훔쳐보고 흠모하며 안타까운 심정을 달랠 수밖에.
가망없는 짝사랑인걸 알면서도 얼마만인지 모를 이 두근거림을 깨닫게 해준 그에게 고맙기까지 하다면 확실히 비정상인 겐가. 아무튼 약한 열병을 앓듯 요즘엔 밤이나 낮이나 그를 떠올리며 행복하고 동시에 더 다가갈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어제는 잠들며 꿈속에서라도 그와 대화를 나눌 수 있기를 소망했는데, 그런 행운은 나타나지 않았다. 꿈에서도 그는 내가 쉽사리 다가갈 수 없는 숭배의 대상이란 뜻일지도 모르겠다.
매몰찬 그의 말대로 일시적인 호르몬 이상일지, 오래도록 이어져 가슴에 응어리로 남을 상처가 될지 현재로선 내 감정을 제대로 분석할 수가 없지만 분명한 것은 오랜만에 찾아온 이 사랑 때문에 당분간은 심히 허우적거리느라 힘깨나 들 것 같다는 점이다. 이 밤에도 문득 그가 그리워서 스토커처럼 그의 행적을 좇다가 결국엔 이렇게 전해지지도 못할 고백을 쏟아놓고 말았다.
너무 오래 전이라 까먹었었나 본데, 사랑은 역시 행복하면서도 괴로운 구석이 많다.
특히 짝사랑은.
혼자서만 전전긍긍 애태우는 내 마음을 누군가 알았던지, 아니면 속상하게스리 나 말고도 그를 흠모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인지 이런 그의 모습을 발견했다.
[#M_어떻게 반하지 않을 수가...|접기|
꺅~~~~~
정말이지 고마울 따름이다.
지극히 드물지만 귀여워서 기절할 것만 같은 그의 미소 장면만 이렇게 모아놓다니...
사람 나이 마흔이 흔들리지 않는 불혹이라는 건 확실히 평균수명이 50세도 안되는 먼 옛날에나 해당되는 말일 게다.
드라마 주인공을 보고 이렇게 홀딱 빠져서 애태우기는 아마도 처음이 아닐까...
<불멸의 이순신>은 아예 보지도 않았고, 그를 눈여겨보기 시작한 건 <꽃보다 아름다워>였으며 <하얀거탑>에 나올 때는 그저 멋진 배우라고 감탄할 따름이었는데 이번 강마에를 선택한 그의 탁월한 안목과 연기를 존경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준수하고 수려한 자태로 입고 나오는 옷 하나도 실망스러울 때가 결코 없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회색 터틀넥에 진한 갈색 재킷을 입고서 입을 가리고 폭소를 터뜨릴 때(세번째 사진!)는 거의 자지러질 뻔했다. ㅠ.ㅠ
그야말로 가을에 사랑하기에 딱인 남자.
실제 위대한 인물이라도 대하는 듯 TV화면을 차마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내 자신이 스스로도 우스꽝스럽지만 어쩔 수가 없다. 이건 사랑이다... 흑.
계절이 바뀔 때마다 변해가는 기후에 적응하려는 신체와 정신의 노력 때문인지 펄럭펄럭 감상의 과잉이랄지 이유없는 변덕과 이런저런 탐욕에 휩싸이는데 나의 경우 그 정도가 가장 심한 계절은 역시 가을이다.
봄엔 대책없이 희망과 낙천주의에 휩싸여 싱숭생숭한 마음의 방향도 아스라한 행복으로 치닫는 데 반해, 가을엔 줄어드는 일조량 탓에 우울 인자가 늘어난다는 학자들의 분석결과를 굳이 따지지 않더라도 툭하면 기분이 바닥으로 떨어져 기어다니거나 가슴 한 구석이 텅 비어(사실 늘 비어있는 곳임에도;;) 찬바람이 숭숭 몰려드는 까닭모를 처연함에 휩싸이게 된다.
가을만 되면 스카프 열망이 타오르는 것도 어쩌면 같은 맥락일지도 모르겠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옷장을 열어보며 입을 옷이 없다고 뻔한 투정을 되풀이하며 소비욕에 불을 댕기는 것과는 약간 다른, 스산함에 허덕이는 가을 영혼을 어떻게든 보듬어 위로해야할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사실, 다른 계절의 옷타령은 그저 새로이 '입을 옷' 장만에 대한 욕구에 지나지 않으므로 해마다 소비의 대상이 다양하고 특별히 어떤 재질에 연연해하지도 않는다. 티셔츠나 청바지, 반바지, 원피스, 가볍고 따뜻한 외투 정도의 단품들이 떠오른다는 뜻이다.
그런데 가을의 경우는 좀 다르다.
해마다 가을이 오면 나는 왜 이리도 가죽에 탐닉하게 되는지.
새로 산 운동화 냄새라든지, 휘발유 냄새라든지, 사람마다 독특하게 좋아하는 냄새가 있기마련이라고도 하는데, 나는 질 좋은 가죽 냄새(코를 찌르는 노린내 가죽 냄새를 말하는 게 아니다!)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동물보호 차원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진짜 동물털과 가죽으로 만든 옷과 가방 따위를 거부하고 인조모피와 인조가죽을 애용해야 한다는 누군가의 주장도 확실히 맞는 말이고, 나 역시 아무리 나이가 들어 뼈에 찬바람이 스미는 노인이 된다해도 작은 동물 수백마리를 조각조각 난도질해 이어붙인 모피코트(옷깃과 소매 정도에 두어마리 동물털을 장식으로 붙인 것이야 어쩔 수 없다. 이미 갖고 있기도 하고;;)를 입고 다닐 생각은 없다.
그런데 양가죽이나 소가죽의 경우는 좀 다르다. 어차피 같은 가죽이고 가엾은 짐승을 도축해 얻은 재료라고 비난하면 어쩔 수 없지만 짐승들이 가여워서라도 채식을 하는 사람들과 달리 난 아직 고기를 꼭 먹어야 힘이 나고 살 것만 같은 야만스러운 인종이라 그 가죽에 대해서도 양심이 좀 덜 찔린다(고 우길란다). 광우병 쇠고기 문제가 대두되면서 그간 인간의 탐욕 때문에 여러 동물들이 얼마나 비윤리적으로 학대받고 있는지, 일부 인구의 육식 편향 입맛 때문에 또 세계 기아인구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수많은 양의 옥수수와 곡식이 가축의 사료로 쓰이는지 다각적인 조명을 받기도 했지만, 민망하게도 나는 아직 육식을 포기하지 못했고 이왕 잡아먹을 수밖에 없는 짐승들이 제 몸가죽까지 속속들이 인간에게 바친다는 사실에 그저 고마워하기로 했다. ㅠ.ㅠ
자꾸 자기변명이 길어지려 하는데, 어쨌든 비난을 받거나 말거나 가을이 오면 내가 특히 가죽옷에 심취한다는 얘기다. 스카프처럼 부담없이 마구 사들일 수 있는 물건은 아니므로 많이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 열망이 커지는 것일 수도 있겠는데, 부드러운 질감과 함께 색깔이며 디자인이 어떻게든 색다르면서도 10년이상 전혀 유행과 상관없이 입을 수 있는 <멋진> 가죽재킷을 장만하고 싶다는 욕망은 희한하게도 가을마다 빠짐없이 불타오른다. 긴것, 짧은 것, 검정색, 빨간색, 갈색으로 이미 기본적인 디자인의 가죽옷은 갖고 있건만, 자신없다는 생각에 선뜻 장만하지 못한, 폭주족을 연상시킬 정도의 과감한 디자인도 늘 선망의 대상이고 이런저런 깃의 모양에 따라 색색깔(짙은 파랑색, 초콜릿색, 따뜻한 베이지색, 검정색 짧은 것...)로 질 좋은 가죽옷을 옷장에 주르륵 걸어놓고 있으면 마구 기운이 솟아 스산하고 처연한 이 가을을 힘내서 견뎌낼 수 있을 것만 같다. ㅋㅋ
가죽 가방 또한 마찬가지다.
몇년동안 꿈의 가방이랄 수 있는, 큼지막하면서 장식이 요란하지 않고 가죽의 질과 냄새마저 좋은 짙은 색깔의 가죽가방을 찾고 있었는데 동물보호의 목소리를 높이는 누군가의 열변에 귀가 얇아져 제풀에 포기하고는 차선책으로 검정색 인조가죽 가방 하나를 사고 말았다는 이야기를 언젠가 이 블로그에 써놓은 기억이 있다.
그런데 그 가방은 1년반쯤 꽤나 사랑을 받다가, 마음에 꼭 드는 것이 아닌 한 이내 싫증 잘 내는 주인의 눈밖에 나 차츰 방 한 구석에 걸려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결국엔 요란한 장식 한 군데가 늘어졌다는 것을 핑계로 단박에 퇴출되고 말았다. 그나마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신세가 된 것은 아니고, 골목어귀에 서 있는 구세군 기부함으로 들어갔으니 원주인이 아니고선 잘 알아볼 수 없는 장식의 <흡집>을 감춘채 새 주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위로하고 있다.
그러고는 내가 또 다시 꿈의 가방을 찾아헤맸음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짐작될 터이고,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고백하자면 결국 내가 그리던 꿈의 가방 자질에 최대한 가까운, 당연히 질 좋은 가죽이기도 한 녀석을 장만하고야 말았다. ^^
작업실 포기 기념이라며 말도 안되는 구실을 붙여 나에게 주는 선물로 명명한 그 녀석을 한달 가까이 손꼽아 기다리다, 드디어 태평양을 건너온 녀석과 상봉하던 날 비닐을 벗기고 나서 풍겨오는 은은한 가죽 냄새를 맡으며 손으로 쓸어 그 부드러운 감촉을 만끽하며 내가 얼마나 흐뭇했었는지 헤벌쭉 흐르는 미소 속에서 돌연, 혹시 이거 가죽 페티시가 아닌가 염려되기도 했다.
한동안 옷장 손잡이에 가방을 걸어놓고 감상하다 가끔 쓰다듬으며 올 가을의 가죽 열망은 좀 잠잠해지는가 했더니 그럴 리는 없다. 오늘 오후 물도 안 든 주제에 벌써 떨어져 바닥에 뒹구는 큼지막한 플라타너스 잎들을 밟으며 도서관에 다녀오는 길에 나는 불쑥 초콜릿색 가죽재킷을 사러가고 싶어졌다.
그나마 마트 앞에 <홍옥이 나왔어요!>라고 적힌 팻말과 함께 반들반들 윤기가 흐르는 빨간 홍옥사과의 자태를 발견하는 바람에 올 가을 처음 새콤달콤한 홍옥 맛을 볼 생각에 정신이 팔려 얼른 지갑을 열었기에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백화점 세일기간이라는데 구경이라도 한 번 가볼까... 하는 소비욕망을 억누르기 힘들었을 것이다.
바야흐로 가을은 가을이다.
홍옥이 나왔고, 높은 하늘은 푸르고, 괜히 쓸쓸하고, 가죽생각은 절로 나고...
유치하고 부끄러운 나의 가을 타령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