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긴이의 말

책보따리 2007. 2. 6. 21:31
번역을 생업으로 삼은지 12년째.
남의 글을 옮기지만 말고 이젠 직접 한 번 써보지 그러냐는 말을 가끔 듣기도 하는데
그럴때마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펄쩍 뛴다.
유명 번역가들 중엔 등단을 한 문인들도 꽤 되지만, 내 경우 번역은 스스로 글을 창작할 자신이 없기 때문에 남의 글을 매만지는 것으로 글쓰기에 대한 만족을 누리는 수단인 것 같다.

원서에 기대어 말을 뽑아내는 것은 그럭저럭 해보겠는데(물론 이 과정에서 아마도 원저자의 본래 의도와는 상관없는 왜곡을 수없이 저지르고 있을 거라는 걸 안다. 다만 그 왜곡이 최소의 수준이기를 바랄 뿐이다), 텍스트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활자로 인쇄될 글을 만들어 쓰라고 하면 참으로 난감하다.
번역원고를 출판사에 넘긴뒤 얼마간 잊고 지내다가, 출간을 앞두고 역자후기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게되면 문득 머릿속이 하얗게 되는 것 같다.
writer's block.
우리말로 옮기기에도 까다로운, 글쓰기의 막막함이 느껴지는 것이다.
옮긴이의 말이라고 해봤자, 특별히 작품해설을 좀 더 심오하게 써달라는 요구를 받는 경우를 제외하면 그야말로 책을 옮기며 느낀 점을 후기 식으로 짤막하게 쓰면 되는 것인데...
난 왜 그리도 옮긴이의 말을 쓰는 것이 어려운지 모르겠다.

그래서 어쩔 땐 일주일 내내 원고지 10매도 안되는 후기 원고 때문에 끙끙거릴 때도 있는데, 또 우스운 것이 출판사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옮긴이의 말을 쓰지 말라고 하면 몹시 섭섭한 이율배반적인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일단 개인적으로 역자후기가 없는 번역서는 신뢰가 가지 않는다.
책 판매를 부추기기 위한 단순한 책자랑이든 아니든(대부분은 내용의 재미 여부나 책의 유용성과 상권없이, 옮긴이는 무조건 자기가 옮긴 책이 훌륭하고 재미있고 유익했다고 자기최면을 걸어 후기에 반영해야 한다!), 옮긴이의 말에서 책에 대한 애정이나 정성이 느껴지면 좋은 번역이란 선입견이 들곤 한다.
그런데 역자후기가 아예 없으면, 혹시 유령 번역가를 앞세우거나 이름만 빌린 엉터리 번역서가 아닐까 의심이 든다는 얘기다.
그렇다보니, 옮긴이의 말을 아주 잘 써야만 할 것 같고, 그래서 더욱 괴로움에 휩싸이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몇년 전 기획출판을 잘 하기로 유명한 출판사에서 동화를 각색한 책을 의뢰받은 적이 있었는데, 원고를 넘기고 출간일이 다가와도 역자후기 쓰라는 말이 없어 의아했다.
그러는 가운데 어느덧 이미 서점에 깔린 책을 들춰보니, 옮긴이의 말 대신 내가 싫어하는 어느 여자 방송인의 추천의 글이 들어 있었다. 묘하게 기분나쁘고 아주 허탈했다.
물론 출판사에서 옮긴이에게 옮긴이의 말을 생략하겠다고 미리 양해를 구해야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고, 내 쪽에서 미리 확인하고 역자후기를 꼭 쓰겠다고 고집을 부릴 수도 있는 것이므로 잘잘못을 따질 순 없다.
어쨌든 그 책은 예쁜 포장과 감각적인 그림을 곁들인 기획에 힘입어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그 때문에 나에 대한 인지도도 제법 높아졌으니 고마워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처음 같이 한 작업이 그런 미진함을 남겼던 까닭인지, 그 뒤로 그 출판사와 일한 책은 기획이 통째로 엎어지거나 출간이 보류되거나 해서 이제 더는 거래를 하지 않게 됐다.
아.. 미수금이 약간 남아있긴 하구나. ㅡ.ㅡ;;

최근에 나온 책에도 옮긴이의 말이 빠진 채 출간 된 게 2권 있는데, 한 권은 출판사 재량으로 아예 나에게 후기 의뢰도 하지 않고 제작을 진행해서 또 한 번 섭섭함을  느끼게 했고,
나머지 한 권은 작년 12월 한참 놀기 바쁠 때에 후기를 의뢰받은 터에 겨우 이틀만엔가 써달라고 해서, 내쪽에서 포기를 한 경우였다. 거의 무슨 만화책 같은 느낌으로 나온 표지를 보며, 옮긴이의 말을 안쓰길 잘했다는 생각도 잠깐 들었지만, 옮긴이로서의 책임감을 회피한 것 같아 못내 마음이 무거워 앞으론 그러지 말아야지 반성을 했었다.

그리고 2007년을 맞아 첫 책이 나올 판국인데
단 하루만에 옮긴이의 말을 써야할 처지에 놓인 것이다. *.*
아...
블로그나 미니홈피에 투털투덜 주절주절 씨부리는 건 얼마든지 하겠는데, 그 수준에서 얼마 벗어나지 않은 나의 잡문이 활자로 인쇄되어 책 뒤에 실린다고 생각하면... 한숨부터 나온다.
휴우~

그래도 작년엔 옮긴이의 말을 읽고 감동을 받아 출판사에 연락처를 알아내 전화를 했다는 어느 여사님의 전화를 난생처음 받기도 했더랬다. (재수없게 다시 잘난척 모드?)
하지만 그 전화를 받고 나서 더욱 옮긴이의 말을 쓰는 것이 두렵기도 하다.
'독자들 절반 이상은 아마 옮긴이의 말 따위 안 읽을 지도 몰라!'라고 자위하며 얼렁뚱땅 설익은 후기를 후다닥 출판사에 보내는 일이 더는 불가능해졌으니 말이다.

쓰라면 괴롭고, 쓰지 말라면 섭섭한 옮긴이의 말..
역자후기쯤은 언제나 거뜬하게 쓸 수 있는 내공을 과연 나는 언제쯤 쌓게 될 것인가.
그런 날은 과연 올까?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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