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의 범위

투덜일기 2011. 1. 29. 00:12

'번역가'를 직업으로 삼으면서 어쩔 수 없이 꼭 해야하지만 내가 무엇보다 하기 싫은 일은 누누이 이야기했다시피 '검토서'를 만드는 일이다. 번역에 앞서 책의 가치를 판단하는 일이므로 대단히 중요한 일임을 알지만, 대단히 편협한 독자로서 나는 책의 재미 여부를 말할 순 있겠으되, 과연 책이 잘 팔릴지 어쩔지 어떤 장단점이 있는지 '분석'을 하라고 하면 그저 멍하다. 노상 지지부진한 일의 진도 때문에 쫓기는 입장이라 대개 짬을 낼 수 없는 상황이기도 하지만, 좀 시간 여유가 있다고 해도 책을 검토해달라는 부탁은 이제 그나마 거절을 잘하는 편이다. 책의 내용은 물론이고 검토소견까지 소상히 '공식 문서' 형태로 작성해야 하는 검토서를 만드는 일은 정말 토나올 만큼 싫기 때문이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얼치기로 아는 출판계 지인들의 부탁을 거절 못해서, 대규모 도서전 이후 원서들이 쏟아져들어올 때는 한달 내내 책읽고 검토서 만드는 일만 한 적도 있었는데, 기껏해야 10만원에서 20만원 정도밖에 주지 않는 검토비(가끔은 그 이상을 제시하는 경우도 있다만;;)도 들이는 품에 비하면 말도 안되는 수준이지만, 상당 수의 출판사에서 번역하는 이에게 검토를 맡기는 이유는 책의 내용이 쓸만하여 번역으로 이어지는 경우, 그 알량한 검토비도 '절약'할 수 있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번역가에 대한 상당 수 출판사의 대우가 겨우 그 정도다. 필요에 따라선 공짜로도 '가끔 써먹을 수 있는 인력'. 물론, 역시나 번역을 맡게 되더라도 사전 검토비는 칼같이 따로 미리 지불하는 '훌륭한' 출판사도 있다.

헌데 양심 불량 출판사의 경우엔 번역가를 또 다른 무보수 노동에도 동원하기 일쑤인데, 책 홍보를 위한 각종 언론자료 번역이 바로 그것이다. 대개는 번역원고를 넘기고 나서 직후나 한참 뒤 책이 출간될 즈음에 부탁을 받을 때가 있지만, 다행스럽게도 번역서 마다 전부 자료번역을 해야하는 건 아니다. 그리고 일부 '개념있는' 출판사에서는 당연히 각종 자료에 대한 번역의뢰도 원고료로 계산해 지불하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상당수의 출판사에선 그냥 은근슬쩍 담당자가 '도움'을 청하는 식으로 들이미는 것으로 끝이 난다. 번역가로선 당연히 책이 잘 팔리도록 도울 의무가 있으니 극구 거절할 입장은 아니다. 정 바쁘면 양해를 구할 수 있을 테고. 또 대부분은 그 자료라는 것이 그리 많지도 않아서 크게 부담되는 일감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긴 해도 게으른 나는 다른 일로 마구 바쁠 때 그런 영양가 없는 일을 하고 앉았노라면 자괴감이 든다. 흔히 번역한다고 하면 "한장에 얼마나 받아요?"라고 물으며 여권서류 번역일 쯤으로 알던 예전 대우와 달라진 게 뭐란 말인가? 물론 사내의 원칙이 어떠하든 담당자의 재량껏 앞뒤 표지와 날개글까지, 자료번역 원고까지 모두 매수계산을 해서 번역료에 반영해 지불하는 출판사도 많으니 무조건 분개할 일만도 아니다.책의 내용을 누구보다 잘 아는 번역가가 관련 자료도 번역해야 제대로 된 카피 한 줄이라도 더 뽑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나 역시 믿으니까.
 
검토서 만들기 만큼 싫은 일은 아니지만 내 경우엔 역자후기 쓰기도 만만칠 않아서 일주일 이상 고민할 때가 많다. 번역하면서 뭔가 틀이라도 잡아놓는 경우엔 다행이지만, 도무지 방향도 못잡고 헤맬 때는 멍하니 백지를 들여다보며 머리털만 쥐어뽑다가 이러면서 무슨 글줄로 밥벌이를 한다는 건가 자학에 빠지기도 한다. 게다가 원고와 역자후기를 다 넘겼다고 번역가의 책무가 끝나는 건 아니다. 역자교정 과정이 아직 남았으니까. 책에 따라서 대단히 수월하게 한번 쓱 읽고 넘길 수 있는 원고도 있지만, 꼼꼼히 다시 원서대조하고 편집자와 용어 협의에 힘쓰느라 2, 3주도 훨씬 넘게 걸리는 역자교정 원고를 앞두면 또 한숨이 나온다. 그 즈음 되면 같은 책을 서너번째로 읽는 셈이니 아무리 재미 있는 책도 멀미가 나지 않겠나. -_-;; 사실 그렇게 멀미나게 역자교정을 마치고 드디어 책이 출간되면, 아무리 여러번 보았더라도 오탈자 확인도 할 겸 마지막으로 읽어주어야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몇장 들춰보는 경우는 있어도 옛날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새삼 읽고 살펴 혹시라도 2쇄에 반영할 부분을 찾아두는 경우가 없었다. 주변에서 오탈자를 일러주어 출판사에 통보한 적은 있었지만...

말 그대로의 '번역' 이외에도 번역가에게 주어지는 일의 범위가 이토록 다양하다 보니, 초창기에 에너지 넘치고 오지랖 넓을 때 작가나 해외 저작권사 쪽에 이메일 보내서 뭔가 작품에 대한 질문을 하거나 특별 서문을 먼저 부탁하는 따위의 정성은 꿈도 꾸지 않게 됐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기 싫다고나 할까. 해외 작가와 각별한 인연을 맺어서 작가 쪽에서 번역가를 독점 지정하는 경우도 더러 있지만, 나라면 미리 사양하고 싶다. 나도 안다. 비겁하고 불성실한 태도다. 하지만 정말로 '전문분야'를 갖고 있는 '전문번역가'를 꿈꾸는 대신 지겹지 않게 이것 저것 골고루 다양한 분야를 섭렵하고 싶은 '종합출판인'을 목표로 삼고 있으니 나도 어쩔 수가 없다. 그러고 보니 번역할 때만 그러는 게 아니라, 작가 한 사람에게 반해서 그 사람 책을 모두 읽는 충실한 독자로서의 태도도 보인 적이 없다. 혹시 싫증나면 어쩌나, 라는 것이 나의 핑계지만, 이러면서 책으로 밥벌이 한다니 참 손가락질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어쨌거나 마감일을 6개월도 넘게 어겼으니 어떤 무리한 부탁을 듣더라도 해줘야할 입장인 판국에, 자료번역에 대한 부분도 모두 원고료로 계산해주겠다는 '개념 있는' 출판사의 일을 하고 있으니 감지덕지해야 하는데, 어쩐지 자꾸 허드렛일 같고 자투리일 같고 쓸데없이 시간 부서지는 일 같고, 원래 내 일이 아닌 것 같은 불평이 불쑥불쑥 피어난다. 출판사에 따라서는 이런 자투리 번역만 따로 맡기는 인력망도 갖추고 있느 곳이 있긴 하다만, 결국엔 내 배가 불렀다. 번역의 원래 범위가 여기까지라고 애당초 생각했으면 될 일인데, 굳이 변명을 하자면 그간 잡역부 취급했던 '일부' 출판사에 대한 고까움이 너무 커서 '책 번역' 이외의 모든 일엔 본능적인 거부감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요번엔 자료 분량이 워낙 많다고 또 변명;;) 그러니 여기다 고백하고 얼른 마음을 고쳐먹어야지. 책 팔아먹으려고 얼굴 팔리는 이상한 홍보에 동원하지 않는 게 어디냐. 암.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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