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퉁불퉁한 평면에선 '반드시' 발을 접지르거나 넘어지는 나에게 계단은 참 못마땅한 장소다.
오늘 또 집을 나오다 계단 끝을 잘못 짚어 발목을 접지르고 보니
언젠가 예고했던 계단 관련 포스팅을 해야겠다 싶어졌다.
역사가 길어서 몹시 길고 긴 포스팅이 될 것 같으니 시간 없으신 분들은 감안하시길
^^;;
다다다닥... 소리를 내면서 날렵하게 긴 계단을 뛰어내려가는 사람들의 기술은 거의 내게
묘기처럼 보일 정도라, 나는 감히 계단을 뛰어내려갈 생각은 품지도 않으며, 별 탈 없이 무사히 내려가면 그저 고마울 뿐이다.
계단이 무서웠던 건 어린시절부터였는데, 내가 넘어져 크게 다쳤던 기억은 딱히 떠오르지 않지만 학교에서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늘 누가 정말로 내 등을 떠밀까봐 겁이 났다.
짓궂은 애들이 가끔 계단 꼭대기에서 등을 떠미는 척 하면서 확 놀래키고는 달아나는 장난을 하곤 했는데, 나는 그런 아이들의 집중 표적이 되었다.
가뜩이나 조심조심 계단 난간을 잡고 내려가야 하는 어설픈 내 모습을 그런 놈들이 놓칠 리 없었고, 틈만 나면 나를 떠미는 척 하고 달아났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계단에 주저앉아 엉엉 울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그애들이 정말로 나를 계단에서 굴러떨어뜨리지 않은 걸 고마워해야 하려나.. ^^
암튼 내 기억에 가장 오래 자리잡은 충격적인 계단 사고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우리 막내동생이었다.
겨울마다 우리 삼남매는 서울 외곽인 화전이나 삼송리 논바닥에 만들어놓은 스케이트장엘 열심히 다녔는데, 내가 5학년이 되자 엄마는 이제 따라다니지 않을 테니 니들끼리 다니라고 하셨고, 나는 1학년, 3학년인 두 남동생 손을 잡고 버스를 한 번 갈아타야 하는 제법 먼 스케이트장엘 다니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눈이 제법 많이 쌓인 육교를 내려오다, 막내동생이 중간 계단참부터 맨 아래 길까지 완전히 '데굴데굴' 굴러내려간 것이다.
7살인 막내가 육교 끝까지 굴러내려가던 순간이 어찌나 길게 느껴지던지, 그리고 내가 최대한 다리를 빨리 놀려 막내한테 달려가던 순간까지가 또 얼마나 길던지, 그땐 정말로 모든 움직임이 슬로 모션으로 느껴졌던 것 같다.
푹신한 솜으로 누빈 파카와 '일명' 스키바지를 입고 털모자까지 단단히 쓴 채 양손을 파카 주머니에 넣고 있던 막내는 앞구르기 하듯 계단을 굴러내려갔으면서도, 다행히 넘어졌던 자리에서 툴툴 털고 일어났고 집에 가서 확인해보고서야 알았지만 놀랍게도 다친 곳이 하나도 없었다. 어쨌든 나는 놀란 마음에 눈물을 훌쩍이며 막내를 들쳐업고 버스 정류장으로 2정거장쯤 되는 거리를 걸어서 집으로 갔더랬다.
서울 시내에 육교가 참 많이 없어졌지만, 문제의 그 육교는 지금도 '미미예식장' 앞에 꿋꿋하게 버티고 서 있는데 11살 이후로 난 일부러 그 육교를 피해 횡단보도로 멀리 돌아다녔고, 어느 육교든 지금도 건너다니는 일이 달갑지 않다.
중고등학교 시절엔 워낙 계단을 두려워해서 조심조심 오르내렸으므로 큰 사고는 없었지만
계단 높이가 균일하지 않다든지, 마지막 계단을 보지 못해 넘어질 뻔하거나 발목을 접지르는 사소한 삽질은 수시로 벌어졌다. 다행히 그 시절엔 친구들과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고 다니는 시기라, 친구들의 도움을 참 많이 받았던 것 같다.
그러다 내가 다시 계단공포에 휩싸인 건 대학엘 들어가서 '하이힐'을 신게 되면서부터였다.
신입생땐 운동화나 단화만 신고 다녔지만, 2학년이 되자 청바지나 진바지에 굽이 뾰족한 색색깔의 하이힐을 신는 게 유행이었고, 그 때나 지금이나 늘 단신의 아픔을 안고 살던 나에게 '하이힐'의 매력은 거부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다니던 학교의 문과대학 건물은 중앙 로비가 둥글게 천장까지 뻥 뚫리고 중간중간 곡선계단--일명 원형계단--이 있었다. 곡선계단의 문제점은 계단 폭의 좌우가 현저하게 다르다는 점인데, 칸이 균일한 계단에서도 공연히 넘어지는 나에게 같은 칸에서도 계단폭이 좁거나 넓어지는 곡선계단은 살짝 짜증나는 대상이었다. 그런데 그런 건물을 매일매일 오르내려야했던 것!
그리고 급기야 사건은 벌어졌으니...
시험기간이라 새벽같이 학교엘 갔음에도 중앙도서관엔 자리를 잡지 못해
문과대학 도서관에 가까스로 자리를 잡고선 친구들과 어울려 자판기 커피를 마시려고 계단을 내려오던 중, 잠이 덜 깼는지 구두 뒷굽이 계단에 걸려 와장창 넘어진 것이다.
(그땐 키높이 운동화 따위가 없었기 때문에 ㅠ.ㅠ 모든 바지를 하이힐 길이에 맞춰 잘랐으므로 시험기간이든 아니든 주야장천 하이힐만 신고 다녔더랬다. 특히 그날 신었던 건 내가 좋아했던 청보라색 하이힐...)
으악... 비명소리와 함께 한번쯤 구른 뒤 그 다음엔 온몸으로 길게 미끄러져 계단을 내려온 나는 그 순간 '죽었나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사람이 죽었는데 누가 웃는단 말인가...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같이 커피를 마시려고 나왔던 친구들이 날 둘러싸고 킥킥 웃음을 참고 있었다. 얼른 일으켜줄 생각은 안하고 웃어댄 친구들한테 나중에 무척 화를 냈지만, 친구들은 내가 넘어지는 모습이 완전 코미디여서 어쩔 수가 없었다고 변명을 했다.
그러면서 드넓은 원형 계단의 계단참에 드러누워 있는 나에게 빨리 일어나라고 성화를 했다.
그제야 둥근 로비 난간 너머로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낀 나는 창피함에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고, 친구들의 부축을 받으며 의무실로 갔다.
다행히 나 역시 그날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다만 온몸에 큼직한 줄무늬를 긋듯 계단 멍이 들었고, 요란하게 계단에서 넘어지는 꼬라지를 많은 이들에게 '구경'시켰다는 것 때문에 자존심에도 상처를 입었을 뿐이었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다시는 그 원형계단에서 넘어지는 일은 없었지만
문제의 장소를 지날 때마다 친구들은 놀리듯 내 팔을 부축해주었다.
그리고 또 다시 계단 망신 사건은 선릉역 근처 회사를 다니면서 벌어졌다.
서대문구에 있는 집에서 강남구까지는 워낙 멀지만 웬만해선 버스를 갈아타고 출퇴근을 했는데, 도저히 시간이 안되면 어쩔 수 없이 지하철을 타기도 했다.
몹시 추운 날, 내복은 물론이고 터틀넥 두 장을 겹쳐입은 뒤 카디건에 오리털 파카를 빵빵하게 입고는 더운 지하철 안에서 낑낑대다 전철역에서 내린 나는 어떻게든 지각을 모면해보겠다고 둔한 몸으로 계단을 '뛰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간 내가 넘어지거나 넘어질 뻔한 사건은 다 계단을 내려갈 때 벌어졌으므로, 올라갈 때 문제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뒤뚱뒤뚱 뛰어오르던 나는 맹렬하게 계단을 뛰어내려오고 있던 어떤 남자와 정면충돌했고 (순간적으로 비켜야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반사신경이 말을 들어주질 않았더랬다 ㅠ.ㅠ), 그대로 뒤로 나동그라져 엉덩방아를 찧으며 계단 밑바닥까지 쿵쿵쿵 떨어져 내렸다.
그때나 지금이나 머리부터 부딪쳐 뇌진탕을 일으키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가 싶은데, 어쨌든 죽도록 창피해 땅속으로 꺼져버리고 싶기는 매한가지였다.
어떤 이들은 넘어지면 수치심에라도 발딱 일어나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한다는데
나는 그렇게 심한 충격을 받고 넘어지면 잠시 꼼짝도 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날도 나와 부딪친 아저씨가 나를 부축해 일으켜 주려 하는 데도, 옷을 하도 많이 입은 탓에 몸이 둔했기도 하려니와 정신이 멍하여 곧장 일어나지 못하고 바닥에서 바동거리다 가까스로 일어났고, 그제야 창피해져 괜찮다고 중얼거리며 달아났더랬다.
그 뒤로, 무역센터 건물 37층에 사무실이 있는 회사엘 1년쯤 다녔더랬는데
당시 나의 가장 큰 공포는 혹시라도 건물에 정전이 되어, 보조 발전기도 아예 작동을 안하는 경우 37층이나 되는 계단을 걸어서 내려가거나 올라가야 하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완전 기우이긴 했지만, 그 회사가 다른 회사로 합병되는 바람에 무역센터 건물을 떠나며 몹시 반가웠다. =_=;
아... 쓰고 보니 자괴감이 더욱 깊어져, 비참한 사연은 그만써야할 것 같다. ㅋㅋ
암튼 택배 아저씨들에게 집을 설명할 때 "계단 위 2층집"이라고 할 정도로
우리집에도 치명적으로 계단이 또 많은데,
멀쩡한 정신으로, 때로는 취해서 집앞 계단에서 넘어지고 구르고 심지어 정신을 잃기까지 했던 아픔이 잊을 만 하면 되풀이되었다는 정도로만 쓰고 넘어가야겠다.
암튼 언제나 계단은 나에게 기다란 요철 혓바닥을 내밀고 입을 벌린 괴물처럼 느껴지는 걸 어쩔 수가 없다.
그나마 운동 좀 해보겠다고 작업실이 있는 6층까지 걸어올라오는 짓거리를 며칠 했더랬는데 요샌 그것도 아예 관뒀다. 계단에서 운동을 하기엔 내 계단 혐오증과 귀차니즘이 너무 크다.
언제고 능력이 허락한다면, 계단은 단 한 칸도 없이 드넓은 마당 있는 단층집에서 살고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