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열나흔날부터 보름날까지 나무 아홉 짐 해오고 아홉 가지 나물에 오곡밥을 아홉 번 먹어야 한다는 세시풍습을 나는 어린시절부터 좋아했다. 보름날 아침에 자고 있으면 엄마가 부럼을 가져와서 어서 깨물으라고 재촉했는데, 부스럼을 비롯해 각종 병을 막아준다는 부럼깨기 풍습도 재미났고, 이름 불러서 더위파는 것도 즐거운 추억이었다. 아이들은 대개 나물을 즐기지 않는다지만 나는 할머니 손에 자라서 그런지 어려서부터 각종 나물이 맛있다고 생각했고, 특히 대보름 나물은 하나같이 좋아한다. 엄마가 부엌일에서 손을 놓은 다음 한두 해는 귀찮아서 오곡밥과 나물을 얻어다 먹은 적도 있었지만, 이내 무모한 도전정신을 발휘해 막요리를 시도하는 쪽을 택했다. 밥이야 어차피 밥솥이 하는 거고, 아홉 가지나 만들 자신과 열정은 없어도 몇 가지 나물쯤이야 몇번의 실패 후 그럭저럭 맛을 낼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이상하다. 분명 작년에도 대보름 나물을 만들었을 텐데 올해는 왜 그리도 다 새롭던지. 결국 시레기 나물은 실패한 것 같다. 다 기록을 해두지 않은 탓에 요리할 때마다 대충대충 하기 때문인가 싶어, 내년을 위해 또 막요리를 기록한다. 시레기 나물과 취나물이 좀 질겨서 속이 상했지만 다섯 가지 나물을 차려놓고 김에 싸먹는 오곡밥은 행복과 지혜의 맛이 틀림없다.
<오곡밥> 재료: 백미, 현미, 흑미, 기장쌀, 서리태, 보리(이미 쌀독에 섞여 들어 있는 잡곡) + 찹쌀, 강낭콩, 동부콩, 이름모를 큰콩 (좁쌀 좋아하는데 이번에 까먹고 빠뜨렸다! 내년엔 잊지 말 것)
1. 잡곡을 다 씻어서 30분쯤 불렸다가 밥솥에 앉힌다.
2. 이번엔 좁쌀을 빠뜨렸지만 좁쌀을 넣으려면 일일이 돌을 골라내야 하고 밥솥에 앉힐 때도 맨 위에 따로 솔솔 얹어야지 처음부터 섞어 놓으면 끓는 과정에서 맨 밑바닥으로 다 쏠려 엉긴다.
3. 취사 버튼을 눌러 밥을 하면 끝이다.
4. 다 된 밥을 살살 뒤적여 그릇에 담으면 찰지고 맛있는 오곡밥을 먹을 수 있다.
어릴 땐 엄마가 꼭 오곡밥에 소금을 좀 넣어 만들어주셨는데, 건강을 생각해서 이젠 넣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확실히 옛날 그 맛은 아니다. 다른 집은 안 그런다는데, 울 엄마는 대보름 오곡밥엔 김치를 먹는 게 아니라며 그 대신 김에 싸먹는 거라고 했었다. 말이 오곡밥이지 그 옛날에도 우리집 대보름밥은 잡곡 수가 다섯 가지를 넘는 경우가 많았다. <오곡백과>가 모든 곡식과 모든 종류의 과일을 의미하는 것이듯 반드시 다섯가지 잡곡으로만 밥을 해야 오곡밥은 아니라고 믿을란다.
<숙주나물> 재료: 숙주, 다진파, 다진 마늘, 소금, 참기름, 통깨.
1. 숙주를 깨끗이 씻어 건진다.
2. 끓는 물에 살짝 숙주를 데친다. 아삭함이 없어지지 않도록 빨리 데치는 것이 관건.
3. 체에 받쳐 좀 식혔다가 물기를 적당히 짠 다음 다진파와 다진 마늘, 참기름을 먼저 넣고(소금이 덜 침투하도록 하려는 나의 비법이다) 조물조물 버무린다.
4. 소금은 맨 마지막에 넣어 간을 맞춘다.
5. 통깨로 마무리.
대보름 나물 아홉가지에는 원래 숙주 대신 콩나물이 들어갈 거다. 근데 나도 그렇고 왕비마마도 그렇고 콩나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훨씬 더 부드러운 숙주나물로 대체했다. 무나물이든 숙주나물이든 하얀 나물 한 가지는 있어줘야 밥상이 예쁘지 않겠나. +_+
<가지나물>
재료: 건가지, 다진 파, 다진 마늘, 간장, 소금, 들기름, 들깨가루, 통깨
1. 말린 가지를 물에 잘 씻어서 끓는물에 15분쯤 삶는다. (시간이 정확하진 않으므로 무른 정도 확인 필요)
2. 가지가 적당히 불고 익었다 싶으면 건져서 프라이팬에 담는다.
3. 볶기 전에 간장, 소금, 다진파, 다진마늘을 넣고 좀 버무려준다. 그러면 간 맞추기가 쉽다는 풍월을 어디서 듣고 해본 건데, 엽분 섭취를 덜하려면 역시나 기름에 먼저 볶다가 간을 하는 게 낫겠다 싶다.
4. 들기름에 볶다가 들깨가루도 좀 넣고, 다 볶아졌다 싶으면 통깨로 마무리.
<시레기 나물>
재료: 삶은 시레기, 다진 파, 다진 마늘, 간장, 소금, 들기름, 들깨가루, 맛선생, 쇠고기 육수, 올리고당, 통깨 (영 맛이 안나서 온갖 재료 총동원)
1. 삶은 시레기를 물에 담가 흙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여러 번 잘 씻어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다.
제대로 하려면 말린 시레기를 푹푹 삶는 것부터 해야하겠지만, 나는 시간절약을 위해 일부러 삶은 시레기를 사왔는데 거기부터 잘못된 것 같다. 당연히 적당히 삶아졌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어찌나 질기던지, 물 많이 넣고 1시간 넘게 볶아도 쉬 연해지질 않더라. 다음엔 삶은 시레기를 사왔더라도 일단 물넣고 푹푹 삶다가 볶을 것.
2. 시레기를 깊은 프라이팬에 넣고 간장, 소금, 들기름을 넣고 볶았는데 어쩌면 시레기는 맨 마지막에 간을 해야하는지도 모르겠다. 먼저 간을 하면 섬유소가 더 질겨지는 것인지도!
3. 물을 넉넉히 붓고 뚜껑 덮어 계속 끓였으나 맛도 없고 질기기만 해서 쇠고기 육수, 들깨가루, 맛선생, 올리고당.. 별별걸 다 넣었다.
4. 어쨌거나 통깨로 마무리.
왕비마마가 제일 기대했던 나물인데 제일 맛없게 됐고, 저녁엔 연해진 이파리 부분만 골라먹었는데 아직도 줄기부분은 질겨서 과연 다 먹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욕심 내고 산 바람에 양은 또 왜 그리 많은지!
<호박고지 나물> 재료: 호박고지, 다진 파, 다진 마늘, 포도씨유, 간장, 소금, 다시마 가루, 참기름, 통깨.
1. 호박고지를 반나절 이상 불려야 한단다. (나는 2시간 밖에 안불렸기 때문에 볶을 때 물을 많이 넣었다.)
2. 불린 호박고지를 깨끗이 씻어서 프라이팬에 넣고 간장 쬐끔, 소금으로 먼저 밑간을 좀 한다. 호박고지는 조직이 연해서 그런지 완성 후에 너무 싱거워진 전적이 있다.
3. 나물을 다 들기름에 볶으면 느끼해질 것도 같아서 호박은 포도씨유에 볶다가 다시마 가루 포함 모든 양념을 넣은 뒤 물을 반컵 이상 넣고 푹푹 끓였다.
4. 호박이 말랑말랑 물러지고 물기도 거의 없어지면 불을 끄고 참기름과 통깨를 넣어 마무리한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대보름 나물이다! 애호박 나물은 늘 새우젓으로 간을 하는데, 내년엔 말린 호박도 새우젓으로 간을 해 볶아도 맛있을 것 같다. 참고할 것.
<취나물> 재료: 삶은 취나물, 다진 파, 다진 마늘, 간장, 소금, 들기름, 들깨가루, 통깨.
1. 삶은 취나물을 잘 씻어 흙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여러번 헹군다.
2. 질긴 시레기 나물에 질려버린 나는 일단 취나물을 냄비에 넣고 푹푹 끓였다. 줄기가 물러졌다 싶을 때까지 계속...
3. 흥건한 물을 거의 다 따라버리고, 들기름, 간장, 소금, 양념을 다 넣고 볶다가 물이 다 졸아들으면 통깨로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