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가장-최고

투덜일기 2009. 9. 25. 16:59

원래 우유부단한 인간임은 알고 있었으나 이젠 둘 중에 고르는 걸 어려워하는 것뿐만 아니라 제일 좋거나 싫은 것, 최고로 마음에 들거나 싫은 것조차 꼽기 어려워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음을 깨달았다. 
하다못해 제일 좋아하는 색깔이 뭐냐고 물어도 대답을 못하겠다.
5월의 신록빛깔, 연한 하늘색, 진한 청보라색이 떠오르지만 그게 옷색깔이라면 또 마음이 달라져서 사람들이 스님 옷이냐고 타박할 정도로 희끗희끗한 회색, 잿빛이 좋고, 검정색도 빠뜨릴 수 없다. 물감색깔 중에 고르라면 아직도 노랑색을 고를지도 모르겠고...
그럼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헐.. 이것도 어렵다. 식탐녀에게 좋아하는 음식을 딱 하나만 고르라고 하는 건 고문이잖아! 일주일 동안 세끼 계속 먹어도 좋을 듯한 음식을 고르면 되겠지만, 불행히도 나에게 그런 음식은 없다. 다 잘먹긴 하지만 음식에 관해서도 잘 질리고 변덕이 좀 심한가. 안 질리는 걸 고른다고 '잡곡밥'을 제일 좋아하는 음식으로 꼽을 순 절대 없는 일... 난감하다.  
마찬가지로 제일 좋아하는 음악, 가수나 밴드, 배우, 최고로 꼽을 만한 영화나 여행지 따위를 정하라고 하면 난 공황상태에 빠져들 것 같다. 이건 이래서 좋고 저건 저래서 좋고 이런 기분일 땐 이게 좋은데 또 저런 기분일 땐 저게 더 낫고, 이게 좋은가 싶으면 저것도 마음에 걸리고, 그렇다는 얘기다.

비틀즈의 리마스터 앨범 발매기념으로 각자 제일 좋아하는 비틀즈 노래를 10곡 20곡씩 뽑는 이웃을 보며 나도 한번 골라볼까 하다가 깨달은 건 나란 인간이 그런 선택조차 제대로 못하는 헐랭이가 됐다는 사실이었다. 단순히 기억력의 문제련가 하고 앨범을 골라 다시 들어보았지만, 선택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아 맞다, 이 노래는 이래서 좋았지 싶고, 저 노래는 역시 가사가 시 한편이로구나 싶어서 좋고, 어느 노래는 어떤 특정한 기억과 맞물려서 중요하게 손꼽아야할 것만 같았다. 왜 이러나 싶어서 그럼 그나마 별로인 곡부터 제외시켜볼까 했지만 마음이 내키질 않았다.
시험 사지선다 답안에서 확실히 아닌 것부터 골라내는 느낌과는 달리, 사과박스에서 일부러 제일 맛없게 생기거나 벌레 먹은 사과부터 골라내며 굳이 기분을 나쁘게 만들 필요는 없지 않나 싶었던 것이다. 그냥 기분 내키는 대로 손에 집히는 사과를 먹으며 기뻐하면 되는 것이지. 게다가 비틀즈라는 사과상자엔 좀 덜익은 건 몰라도 벌레먹거나 썩은 사과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을 텐데.

어린 조카들에게 물으면 제일 좋아하는 색깔이 무엇인지, 가장 좋아하는 가수나 배우가 누구인지, 어떤 음식이 최고로 맛있는지, 제일 친한 친구는 누구인지, 제일 좋은 동물과 제일 싫은 동물이 무엇인지 스스럼없이 0.5초만에 대답이 튀어나온다. 단순한 사고로 온 열정을 다해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잃지 않은 아이들을 보면 나는 쓸데없이 생각이 너무 많고 우유부단하고 무엇에도 열정이 없는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음이 더욱 실감된다. 아이들이 아니더라도 좋고 싫음에 대한 판단력의 예리한 각을 잃지 않은 어른들이 참 많던데 난 왜 이렇게 된 걸까. 이래도 흥, 저래도 흥, 아무래도 상관없고 아무거나 괜찮은 회색인간의 아무거나 인생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건만. 

어렵사리 생각해낸, 유일하게 아직 변하지 않은 듯한 최고의 음료 커피나 마시면서 멍해진 두뇌를 좀 자극해봐야겠다. 제일 좋아하는 음료마저 변하진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런데... 음... 정신 바짝 나게 아이스커피로 마실까, 그냥 뜨겁게 마실까... 으악~~~ ㅠ.ㅠ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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