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감

삶꾸러미 2009. 1. 11. 21:02

어린 조카들이 차츰 말을 배워 적절하게 써먹고 뜻을 알아가는 과정을 지켜보면 참 신기하고 재미가 있다.
이제 겨우 원할한 소통이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나이인 세살 짜리 꼬마가 발음도 어눌하게
"일단은 해보자." "어차피 내 거야." 따위의 말들을 하는 걸 들어본 적이 있는가.
다른 사람들한텐 어떻게 들리는지 몰라도 난 너무 귀여워서 거의 자지러지는 반응을 보이며 자꾸만 말을 시켜보게 된다.
어른들의 말을 유심히 듣고 새겨두었다가 나름대로 적지적소에 배운 말을 써먹는 아이들의 언어능력은 정말이지 깜찍하다.

운좋게도 어른이 된 다음에 할머니, 할아버지 상을 당했던 나와 달리, 너무 어린 나이에 노할머니와 할아버지 상을 당한 조카들은 <돌아가시다>란 말이 죽음을 에둘러 표현하는 말임을 이미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죽음>이라는 말은 함부로 언급해서는 안되는 불길한 말이라는 것도 어느새 깨달은 듯하다. 더불어 동방예의지국의 후예들 답게 '시'라는 접미어엔 높임의 뜻이 들어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해서 가끔은 너무도 어른스럽게 어른들을 놀래킨다.

재작년이었던가. 탈장수술을 받느라 입원을 해야했던 어린 준우가 병실에 누워 제 엄마에게 심각하게 물었단다.
"엄마, 나 돌아가는 거야?"
어린 꼬마가 전신마취를 하고 수술을 받아야한다는 사실이 안쓰러워서 눈물바람을 하는 제 엄마 때문에 제딴엔 대단한 중병에 걸린 것으로 오해를 했던 모양인데, 나중에 그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나는 녀석이 너무 귀여워서 한참이나 깔깔거리다가, 죽음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 조카들이 가여워서 마음이 아팠다.

며칠 전엔 또 정민공주 때문에 웃다가 서글퍼진 일이 있었다.
그동안 고모의 직업이 무엇인지 몰랐던 것도 아니건만 최근 베스트셀러가 된 책 때문에 서점에서 제 눈으로 고모의 명성(?)을 확인한 정민이는 새삼스레 고모가 번역한 책들을 욕심내기 시작했고, 처음엔 재미있는 책만 추천해달라고 하더니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모든 번역서를 죄다 한권씩 자기에게 달라고 졸라대기에 이르렀다. 초기 번역서들은 나도 한권밖에 갖고 있지 않은 터라 그럴 수 없다고 했더니, 공주는 내 번역서들이 꽃힌 책꽂이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그럼 고모 돌아가면 이 책들은 전부 정민이한테 물려준다고 유언장에다 써주라. 아참, 무서운 책들은 빼고 다 준다, 그렇게 써놔. 알았지?"

말로는 걸핏하면 내일 당장 죽을지 모르니깐 오늘을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면서 미래에 대한 준비가 부족한 하루하루를 핑계대고 있긴 하지만, 죽음 역시 삶의 연속선에 놓여 있음을 실감하긴 했지만,
그래도 어린 조카들이 죽음을 너무도 가까이 실감하고 예상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어찌나 서글픈지 하하 웃으면서도 가슴엔 뻥 큰 구멍이 뚫리는 것 같았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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