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지인의 집에 놀러갈 일이 있었는데, CF 어린이 모델 뺨치는 미모와 재롱을 선보인 지인의 딸 때문에 특히 즐거움이 더했다. 겨우 3살인데도 수정구슬처럼 예쁜 목소리로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며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 그야말로 온갖 재능을 다 갖춘 예쁜 아기를 보며 좋아라 하노라니 정민공주도 좋지만 여자 조카가 또 생기면 좋겠다는 바람이 절로 들었다. 그러면 어느새 많이 벗어진 콩깍지가 또 온통 내 눈을 가려줄 텐데! ^^
매번 지지부진하긴 했어도 연애 경험이 전무한 것도 아니건만 살면서 나는 불행히도 남자한테 콩깍지가 씌어본 적이 없다. -_-;; 함께 한 시간이 길어지면서 처음에 눈에 거슬리던 단점이 안보이고 좀 참아주는 수준이 된 적은 있지만, 사랑의 콩깍지 때문에 오래도록 객관적인 판단을 못내릴 정도로 남자한테 허우적거린 적이 없다는 뜻이다. 그것도 집안 내력이려니 생각할 수 있으면 아쉽지도 않으련만, 원래 우리 집안 핏줄엔 낭만적 연애인자가 꽤나 풍부하다는 심증이 깊어 나홀로 별종으로 살려니 퍽이나 입맛이 쓰다.
예를 들어, 아 글쎄 울 엄마는 첫사랑인 울 아버지를 만나 8년이나 연애를 하고 결혼을 했는데 자기 남편 키가 그리 작은 줄을 한참 살다가 깨달았다고 했다. 울 아버지는 당시 대한민국 남성 평균키라고 큰소리를 쳤다지만, 불과 165cm의 단신. 반면에 울 엄마는 처녀시절 160cm에 45kg로 별명이 '와리바시'(나무젓가락을 뜻하는 일본말이다)였단다. 두 분 다 젊은시절 워낙 호리호리한 몸매였으니 당연히 여자인 엄마가 더 커보였을 텐데, 울 엄마는 어쩌자고 10년이나 지난 뒤에야 콩깍지가 벗어진 것일까? 나로선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군대시절에 쓴 아버지의 일기장을 봐도, 다음 해에 바로 결혼을 하셨으니 8년 연애의 막바지라 시큰둥할 때도 됐건만 <온 세상이 너를 버려도 나는 결코 너를 놓지 않으리라>라는 비장한 말과 열렬한 사랑의 고백이 수시로 적혀 있다. +_+
어쨌거나 내 눈이 완전히 콩깍지에 덮여 이성적, 객관적 판단을 내리지 못한 채 허우적거렸던 경험은 딱 한번, 정민공주의 탄생으로 비롯됐다. 하기야 그땐 첫조카에 대한 내 생각과 판단이 다분히 객관적이며 이성적, 보편적이라고 당연히 여겼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구 강요하는 수준이었다. ^^
그 무렵의 나는 걸핏하면 조카 사진을 꺼내들고, "세상에서 이렇게 예쁜 아기를 보았느냐?"고 사람들에게 물었고 대답이 시큰둥하면 벌컥 분노가 치밀었다.
<프렌즈>였던가, 예쁘지도 않은 아기 보여주며 예쁘지?, 예쁘지? 라고 묻거나 말도 못하는 아기한테 수화기 대주면서 바보 같은 유아어로 통화하라고 강요하는 거 정말 싫다는 에피소드를 보며 나도 킬킬 웃기는 했지만, 속으로 우리 정민공주는 정말 예쁘니까! 라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심지어 공주의 부모도, 거의 광분해서 예쁘다고 부르짖는 나에게 <에이~, 예쁘긴 하지만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아기는 아니지>라고 일깨워주었는데 그러면 나는 막 화가 날 정도로 팔불출 고모였다.
물론 정민공주는 실제로도 예쁘다고 아직도 굳게 믿고 있지만,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아기>라고 눈을 반짝거리며 공주의 사진 3종세트를 들이밀 때 사람들이 속으로 어떤 생각들을 했을지 돌이켜보면 웃음이 난다. 대부분 <네, 참 예쁘네요>라고 응수는 했지만 절반은 속으로 비웃거나 짜증을 내지 않았을까?
돌아보니 공주에 관한 한 콩깍지가 완벽하게 덮여있던 건 5살까지였던 듯하다. 공주가 다섯살 되던 해 또 다른 조카가 태어났으니 말이다. 다른 조카들에겐 미안하지만 유일하게 공주님이기도 하고 첫조카이기도 한 정민이만큼 다른 녀석들에겐 심하게 콩깍지가 씌어지질 않는 게 사실이다. 물론 다들 예쁘긴 한데, 처음처럼 미쳐 광분할 정도는 아니라고나 할까... ㅎㅎ
뒤늦게 대학원에 다닐 무렵에도 아직 콩깍지가 조금도 벗어지지 않았던 때였던 것 같다. 그러니까 쓸데없이 다들 공부에 힘쓰는 합동연구실에 공주를 데려가 자랑하는 작태를 보일 수 있지 않았을까. 연구실 책상에 내가 늘 공주의 사진을 세워두고 자랑을 일삼기는 했었지만, 그리고 주말엔 주로 우리집에 와 있던 공주가 학교 간다고 매일 집을 나서는 고모를 따라가겠다고 떼를 쓴 적이 있기는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무슨 생각으로 몇번이나 학교에 공주를 데려갔는지 참 민망하기 그지없다.
아이들을 좋아하는 벨로나 착한 후배들이 반겨주긴 했으나, 딸도 아니고 조카를 데려와 자랑하는 팔불출 고모를 손가락질한 이들도 분명 있었을 게다. 그랬던 그들이라도 자기 조카나 자식이 생겨서 눈에 콩깍지가 덮이게 되면 그런 무모한 짓을 벌일 수도 있다는 걸 이제는 이해해주려나...
며칠 있으면, 태명 '짱이'로 세상에 나와 태어난지 열흘만에 또 한살을 먹어야 했던 정민공주의 10번째 탄신일이다. 공주 못지않게 생일파티를 기다리며 고모도 마음이 설렌다.
이제와서 새삼 남자한테 콩깍지가 씌는 일은 없을 듯하니, 내 인생의 콩깍지는 이제 조카들을 향한 것일 뿐이리라. 세월이 흐르면서 꽤나 헐거워지긴 했어도 이 팔불출 고모의 콩깍지는 평생 안벗어질 것 같은 예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