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사랑을 타고

놀잇감 2008. 7. 22. 20:58
젊은이들은 옛날 영화 <비는 사랑을 타고(Singing in the Rain)>는 모르는 대신 뮤지컬 <사랑은 비를 타고>를 더 잘 알겠지만, 노래도 그렇고 빗속을 걸어가며 발로 물장구를 치다 우산을 빙글빙글 돌리는 영화 속 장면은 요새도 오마주인지 패러디인지 표절인지 알 수 없는 명목으로 비슷하게 재생산되고 있다.
어린 시절에 본 그 영화와 장면들이 깊이 각인된 때문인지
장마철만 되면 나도 그렇게 빗속을 신나게 쏘다니고 싶은 충동이 되살아난다.
더불어 예쁜 장화와 우산에 대한 로망도. -_-;

내가 어린 시절엔 겨울 부츠와 함께 장화도 부잣집 아이들만 누릴 수 있는 사치품이었거나, 엄마들이 꽤나 별러야 사줄 수 있는 고가의 물건이었던 것 같다.
물론 본인들은 신발주머니에 잘 들어가지 않는 장화를 신고 학교에 오는 게 매우 싫다고 투덜거렸지만
나는 예쁜 비옷(비닐 거적대기를 둘러쓴 것 같은 내 비옷과는 차원이 다른;;)과 장화와 예쁜 우산을 세트로 들고 온 친구를 내심 몹시 부러워했었다.
나중에 나도 사촌언니가 물려준 장화를 신어볼 기회가 있기는 했지만 발이 젖지 않는다는 기능에만 충실할 뿐 조금도 예쁘지 않은 그 장화는 오히려 신고 다니기가 창피스러웠다.

어른이 된 뒤에 별 필요도 없는 문방구 쇼핑에 탐닉하는 나의 버릇이 가난했던 어린시절에 대한 보상심리가 작용한 때문이라고 인정하듯, 예쁜 장화와 우산에 대한 나의 로망 역시 어린시절 누리지 못한 것에 대한 뒤늦은 욕심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는데, 문제는 여전히 내가 선뜻 <저지르지> 못하고 탐하고만 있다는 것이다. ㅠ.ㅠ
물론 지름신에 홀라당 넘어가지 못하는 이유가 경제적인 것만은 아니기에 어느 정도는 수긍을 하지만
그럼에도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구멍은 수시로 나를 들쑤신다.
작년부터 장화를 살까말까살까말까살까말까 수십번도 더 고민했던 이유는 이를테면 이렇다.
1. 장화는 굽이 제일 높아봤자 5.5센티미터다. (간혹 6cm굽이라고 선전하는 데가 있긴 하지만 거짓말이다. 실제로는 5cm에 더 가깝다!) 최소 7센티미터는 돼야 내 신발될 자격이 있는데;;
2. 겨울부츠는 종아리 굵기를 교묘하게 가려줄 디자인과 길이가 다양하지만, 레인부츠는 길어도 굵은 종아리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힘든 디자인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막상 사놓고도 차마 못 신고 나갈 확률이 높음.
3. 장마라고 해도 비가 잘 오지 않는 요상한 요즘 날씨 + 좀처럼 외출을 하지 않고 방구들 귀신에 가깝게 살고 있는 내 처지 = 과연 장화를 사서 여름에, 아니 일년에 몇번이나 신을 수 있을까? +_+
4. 3번의 이유 때문에 형편없이 활용도가 낮은 물건치고는 가격이 너무 비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얼마전부터 내가 눈독을 들이고 있는 이 부츠는 가격이
무려 6만8천원. 봄부터 노리고 있는데 세일도 절대 안한다.
ㅋㅋ ^^;;
내가 물건을 살 때의 기준으론 <가격대비 만족도 및 활용도>가 가장 중요한 항목인데, 일년에 두어번 신으려고 이걸 사들인 뒤 좁아터진 신발장에 보관만 하려니 아직은 사고픈 욕망보다 사지 말아야한다는 이성이 더 큰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하지만 우산은 또 다르다.
이미 이런저런 이유와 핑계를 붙여 사들인 우산이 몇개나 되는데도 사고 싶은 우산은 자꾸 내 레이더망에 걸려들고, 장화에 비하면 가격마저 착한 편이고 활용도도 높다. ^^
그렇다고 무턱대고 물건을 질러대는 인간은 또 아닌지라, 기다란 장우산이면서 우산모양이 깊어 비바람이 쳐도 머리가 쉬 젖지 않을 듯한 우산을 사고 싶다는 바람을 꽤 오래 간직만 하고 있었다. 까다로운 내 입맛에 딱 맞아떨어지는 장우산을 만나기가 이상스레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우산의 특징상 내가 들기엔 너무 길고 크거나, 내가 바라는 만큼 폭 덮이는 깊이가 아니거나,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레이스 따위의 장식이 요란하거나... 암튼 그랬다.

그러다가 올 장마철이 시작되었고, 비가 오든 말든 장화와 우산에 대한 나의 로망은 연일 꿈틀꿈틀 특히 밤마다 되살아나 나는 어느틈엔가 인터넷 사이트들을 배회하고 있었다. 여전히 내 조건에 딱 맞을 정도로 마음에 100퍼센트 파고드는 우산은 없었던 반면, 괜히 눈길을 끄는 녀석은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바로 요것. ^^
장우산이기는 하지만, 돔 형태가 내가 바라는 만큼 깊지지도 않고 언제 찢어질지 모르는 비닐우산이고 수동이며 당연히 oem 중국산이다.
위시리스트에 담아두고 들여다보며 나는 계속 지름의 욕망과 티격태격했다.
"사용후기를 보니 비닐이 그리 튼튼하지도, 완전 투명하지도 않대."
"그림제목이 <girl's goods>라니! 그림이 너무 여성적이고 편협하잖아."
"사진은 그럴듯해 보여도 실물로 보면 훨씬 허섭할거야.."
"아무리 신지 가토 제품이라지만 비닐우산치고는 가격도 비싼 편 아닌가?"
.......


하지만 결국 열흘쯤 전에 난 이 우산을 사고야 말았고
온종일 비가 내리는 날 쓰고 나가려고 계속 벼르고 있었는데 아직 본격적으로는 한번도 못써봤다. -_-;;
복날 삼계탕 재료 사러나가면서 잠깐 차에 타고 내릴 때 시운전(?)을 해본 것이 전부. ㅜ.ㅜ
마른장마가 끝나고 드디어 비가 내린 지난 주말엔 변덕스럽게 비가 오락가락해서 길다란 장우산을 들고 외출하기가 번거로웠고, 거기다 태풍이 몰고온 비라 바람에 혹시 비닐이 벌어질까 염려스러웠기 때문이다. 흠...

바짓가랑이 젖을 염려 없는 반바지에, 역시 젖어도 상관없는 고무재질의 발가락 슬리퍼를 신고 후두두둑 비닐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I'm singing in the rain~♪> 노래 흥얼거리며 물웅덩이에서 좀 철퍽거려줘야 하는데!

사실 <비는 사랑을 타고>라는 제목으로 뭔가 글을 끼적여야겠다고 생각한 동기는 따로 있었다. ^^;
지지난주 주말엔가, 억수로 비 내리던 날 그야말로 영화같은 장면들을 연출한 이가 있었으니...


다음에 비가 많이 내리는 날엔 나도 기필코 저 우산을 쓰고 나가 첨벙거려주리라 결심하며 주간 날씨를 열심히 살피고 있다. 다행히 이번주에 또 비온단다, 야호! ^^*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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