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력이 나쁘고 기록해두는 습관도 없어서 체계적으로 과거를 되돌아보는 일엔 워낙 젬병이지만 일하기 싫다는 핑계로 덩달아 찾아보기로 했다. 씨네21이 창간되었다는 1995년은 내 인생에서도 분기점을 이루는 해다. 어설프지만 번역가로 첫발을 디딘 해이기 때문. 직장생활을 할 때보다 상대적으로 자유로웠고 나름대로 문화생활을 많이 하여 얄팍하게나마 견문을 넓히려고 생각했으므로 영화도 꽤 자주 본 것 같은데, 내 머리는 13년의 세월을 갈무리해두기엔 용량이 너무 작거나 성능이 떨어지는 게 확실하다. -_-;; 언뜻 떠오른 <시네마 천국> <가위손> <조이럭 클럽> <길버트 그레이프> <파니핑크> 같은 영화들은 검색해보니 그보다도 훨씬 이전에 본 영화였다. 제목은 그럴듯하게 <최고의 영화>라고 붙였지만,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냥 내 기억에 남았으니 가장 인상적이었던 영화들이다. 영화가 좋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영화를 보던 때의 에피소드 때문일 수도 있겠으나, 아무튼 영화를 보고 나서 중고 비디오를 사 소장하거나 나중에 dvd로 갖고 있기도 한 영화가 꽤 되는 걸 보면 퍽 좋아한 영화들이라는 게 맞다. 리스트를 뽑고 나서 나도 조금 놀랐는데 ㅎㅎㅎ 하나같이 말랑말랑하다. ^^
첨밀밀(1996/1997): [제작은 96년에 했고 국내개봉은 97년에 했단다^^] 영화관에서 보고, 나중에 비디오 나온 다음에 또 보고, TV에서 해줄 때 더빙판으로 또 찾아보고 그러다 케이블에서 해주는 걸 녹화도 했더랬다. 내가 하도 좋아한다니까 지인이 CD를 구워주기도 했는데, 결국엔 DVD도 샀다. ^^ 서플먼트가 거의 없는 졸속제작 DVD지만, 가끔 삶이 너무 심난해서 행복해지고 싶은 필요가 있을 때 멍하니 쳐다보고 있게 된다. 꼭 만나야 할 사람은 결국 만나게 된다는 인연설을 순진하게 믿고 싶은걸까. 여러 장면이 기억에 남지만, 맨 처음 봤을 때는 여명이 장만옥의 옷을 입혀주면서 단추구멍이 작아 어렵사리 단추를 끼느라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나던 장면이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요즘이야 중국산 옷이 전세계적으로 판을 치지만... 옛날 첫 회사 다닐때 중국 공장에 발주했던 옷들이 본생산에서 단추구멍 때문에 늘 클레임에 걸려 난리법석을 피우곤 했던 개인적인 경험 때문에라도 참으로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 등려군의 노래를 비롯해 ost도 다 좋다. ㅎㅎ
러브 액추얼리(2003): "모든 등장인물의 짝짓기가 궁극의 목적인 영화나 드라마는 싫어!"라고 신경질 내긴 했지만, 드물게 포장도 내용도 화려하고 알찬 <종합선물세트> 같은 이 영화는 역시나 보고 나면 행복해져서 좋다. 특히 영화 처음과 마지막에 공항에서 상봉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을 몰래 카메라로 담은 장면을 편집해 넣은 부분이 어찌나 따뜻하게 느껴지던지. ost도 좋았고 콜린 퍼스, 리암 니슨, 앨런 릭맨까지.. 내가 좋아하는 남자배우들이 총출동한 것도 신났으며, 늘 별로라고 생각했던 휴 그랜트마저도 괜찮아 보였다.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반드시, 그리고 크리스마스가 아니어도 한번씩 보며 헤벌쭉 웃는다. 이 영화 이후 <러브 액추얼리> 짝퉁 같은 한국영화들이 많이 나왔지만 다 실망스러웠는데, <라디오 스타>도 어쩐지 이 영화에서 퇴물 록스타의 에피소드만 쏙 빼서 이야기를 확장시킨 거라는 혐의를 버릴 수 없다. ㅋㅋ
비포 선셋(2004): 다들 <비포 선라이즈>보다 9년 후의 이야기인 이 영화를 훨씬 더 좋아하지만, 거의 반나절에 불과한 시간을 따라가며 둘이 끊임없이 수다떠는 내용에 불과한데도 어찌나 좋았는지 영화 보는 내내 한 순간도 딴청을 부릴 수가 없었다. 줄리 델피가 직접 기타 치며 불렀던 노래는 한동안 내 미니홈피의 배경음악으로 깔려 있기도 했지만, 이후 둘이 툭툭 던지듯 주고받던 대화는 묘하게도 한동안 불쑥불쑥 떠올라 생각에 잠길 때가 많았다.
러브 레터(1995/1999): 워낙 유명해서 파일로 나돌았지만 나는 개봉관에 일부러 가서 봤다. "결국 지긋지긋한 첫사랑에 대한 신파적인 영화"라고 생각하면서도 좋다. ^^; 비디오와 dvd를 동시에 소장하고 있는 영화이기도 한데, 작년에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보니 느낌이 또 달라 예전과는 다른 부분에서 눈물이 났다. 이후 이와이 슌지 감독 영화를 꽤 찾아서 봤는데, 역시나 난 이게 제일 좋더라. ㅋㅋ 많이들 그랬다지만 나 역시 이 영화를 보고나서 처음으로 "오겡끼데스까" 이외에 일본어도 배우고 싶어졌고, 겨울에 일본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
(아.. 영화 사진 찾아 올리기 이제 귀찮아서 그냥 텍스트만 써야겠다 -_-;;) 아멜리에(2001): 오드리 토투의 사랑스러움과 엉뚱함을 극대화한 영화라고나 할까. <델리카트슨>을 만든 감독으로 알고 있는데, 몽환적이기도 하고 묘한 상상력을 발휘한 부분이 유쾌해서 좋았다. ost가 좋다는 생각은 별로 안해봤는데 언젠가 홍대앞 어느 미용실에서 ost를 들으며 보석 같은 장면들이 떠올라 아코디언 연주로 기억되는 몇몇 음악들을 마구 찾아 듣기도 했었다. 역시나 행복해지고 싶을 때 보면 딱 좋은 영화. ㅎㅎ
집으로(2002):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에 영화 도입부부터 거의 엉엉 울다시피하며 영화를 봤고, 꺼이꺼이 통곡하느라 창피해서 당황하여 놓친 장면들 때문에 한 번 더 영화를 보러 갔었는데 두번째는 또 다른 부분에서 많이 울어 눈이 퉁퉁 부었더랬다. 한정판 dvd를 손에 넣은 다음에도 또 울까봐 한동안은 못보고 쓰다듬기만 했었는데, 그 콩알만하던 승호가 큰 모습을 요즘 보면 그저 놀랍다. 나중에 다시 볼 땐 일부러 관객들의 눈물을 자극한 부분들이 약간 거슬리긴 했지만, 돌아가신 나의 두 할머니에 대한 추억 때문에라도 내겐 소중한 영화다. 그나저나 이정향 감독은 이 영화 이후 왜 계속 침묵하나 몰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을 대체로 좋아해서 <이웃집 토토로>를 제일 먼저 떠올렸는데 그건 정말 오래전 영화더군. ^^;; 왜색이 가장 짙은 애니메이션이라는 얘기도 있지만 나는 그래서 더욱 독특하고 색달라 흥미로웠고, 미야자키 하야오가 거의 모든 작품에서 이야기 하는 환경문제를 조명했던 데다 <이웃집 토토로>에 나오는 먼지귀신(?)들이 떼거지로 나오는 것도 재미있었다. 영화관에서 본 것까지 합쳐서 10번은 봤을 텐데도 dvd를 보면 아직도 새록새록 새삼스러운 부분이 눈에 띈다. +_+
인생은 아름다워(1997): 그해 아카데미 상을 수상하기 전에 종로에 엄마랑 나가서 봤는데, 두 모녀가 손수건 한 장을 번갈아 적시며 엉엉 울었다. 특히 안쓰러운 장면에서 울 엄마가 "아유..."라며 한숨을 쉬는 바람에 주변 사람들이 울다가 웃기도 했고, 두 여자가 퉁퉁 부은 얼굴로 영화관을 나와 버스정류장으로 걷다가 몹시 배가 고파 닭갈비집에 들어가 저녁을 먹었다. 언제 울었냐 싶게 냠냠 쩝쩝 밥까지 두 공기 볶아서 박박 긁어 먹고는 배를 두들기며 집에 돌아왔는데, 그 뒤로 엄마는 그날 먹은 닭갈비 얘기를 몇년 동안이나 했었다. 난생처음 먹어본 닭갈비가 그렇게 맛있었다나. 나 역시 이 영화는 엄마랑 닭갈비를 동시에 떠올리지 않고는 상상이 안되는 영화다. 미국과 미군을 전세계의 구원자인 것처럼 그린 부분은 약간 토나올 것 같았지만 로베르토 베니니가 아카데미를 노리고 전략적으로 상투적인 결말을 집어넣었을 거라 생각하며 눈감아주기로 했고, 배를 잡고 웃다가 찔찔 울다가 정신없이 휩쓸리게 만든 이야기의 힘은 인정할만 하다.
인어공주(2004): 별 이유 없이, 아니 약간 혀짧은 소리를 내는 발음 때문에라도 나는 전도연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도연이 나온 영화를 굳이 찾아보는 편은 아니었는데 후배가 이 영화는 꼭 봐야한다고 강제로 데려가 보게 됐었다. 까짓것 박해일이랑 고두심을 봐서 봐주자...고 생각했다가 뒤통수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묘한 기분으로 영화관을 나섰던 기억이 있다. <징한> 가족의 이야기를 이렇게도 예쁘고 가슴 시리게 그려낼 수도 있구나 싶기도 했고, 장면 하나하나가 참 정성들여 찍은 태가 나고 하도 예뻐서 막 기특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요새도 케이블 같은데서 다시 보여주면 마술에 걸린 것처럼 채널을 못돌린 채 멍하니 또 보고 앉아 있다.
파이란(2001): 최민식의 연기력이야 모두들 인정하는 바이지만 나는 이 영화에서 한물 간 조폭 강재로 나온 최민식의 연기가 가장 좋았다. 웬만해선 조폭영화는 보지 않는다는 별스러운 원칙도 세워둔 인간이 어쩌다 이 영화를 보게 됐는지 기억도 나질 않고 누구랑 봤는지도 모르겠지만, 먹먹한 가슴이 오래도록 진정되질 않았던 마음은 확연하게 떠오른다. 어눌한 우리말로 연기한 장백지도 예뻤지만 가볍기 이를데 없었던 공형진도 좋았다. 특히 파이란의 봄바다를 담은 비디오 장면을 보거나 떠올리면 조건반사처럼 지금도 눈물이 나올 것 같다.
위의 영화는 그냥 떠오르는 대로 적었기 때문에 딱히 순서는 없다. 연도별로 정리할까 하는 생각이 나중에 들긴 했는데 귀찮아서 안할란다. ㅎㅎ
생각나는 영화들이 별로 없어서 10개를 고르기가 그리 어렵진 않았지만 조니 뎁과 줄리엣 비노쉬가 나왔던 달콤한 영화 <초콜릿>과 <빌리 엘리어트>, <수면의 과학>도 물망에 올랐다가 밀려났음을 밝혀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