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일이란다.
듣기평가 시간엔 전국에서 비행기도 못뜨게 하는 나라로 세계에서 유일하다는 얘길 들은 것도 같은데
사실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암튼 해마다 시끄러운 수능 열기를 지켜보며 늘 나의 과거가 떠오른다.
물론 나때는 학력고사였다.
"니들의 대학 수준에 따라 남편감과 팔자가 달라진다"고 서슴없이 말하던 무서운 선생들의 압력이 아니어도
겨우 하루 시험에 12년 공교육의 향방이 갈린다는 게 참 억울했다.
푸는 것보다 찍는 것이 더 많은 수학과목 때문에 모의고사 점수가 늘 들쭉날쭉했던 나는
수학이 포함된 2교시 과목을 치르고 나서 이미 비감에 젖었었다.
때에 따라 10문제까지도 풀 수 있었던 모의고사 수학시험에 비해 실전에선 아는 문제가 딱 6개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아.. 난 수학이 정말 싫고 어려웠다 ㅠ.ㅠ. 그리고 정말로 발표뒤에 알게된 수학 점수는 딱 12점이었다! 번호 하나로 몰아서 찍었으면 차라리 좋았을 것을;;)
고사장은 서울 정독도서관 근처에 있는 풍문여고였는데
마지막 시험시간이 지나가고 문제지와 답안지 수거가 무사히 끝났으니 하교해도 좋다는 방송을 듣고
운동장으로 내려가자, 12월이라 이미 어둑어둑 날이 저물기 시작한 교정엔 하필
진추하의 One summer night이 흘렀다.
무척 슬픈 영화 <사랑의 스잔나>의 삽입곡이었던 그 노래 때문에 가뜩이나 우울한 심정은 더욱 극에 달했는데
설상가상 교문 앞엔 집에 있을 줄 알았던 엄마가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를 보자마자 나는 말도 못하고 그만 엉엉 울음을 터뜨렸고,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도 계속 훌쩍거렸다.
시험결과가 발표된 후 나는 내심 반드시 재수를 해서 더욱 좋은 점수를 손에 쥐겠다고 결심하며
똑같은 공부를 1년 더 하는데 어떻게 점수가 오르지 않겠나 반문했었다. ^^
사실 고3시절 나는 야간자율학습 시간에도 걸핏하면 떡볶이를 먹으러 내려가거나(학교가 산꼭대기에 있었다 ㅋㅋ) 꽤 넓은 대학교정을 쏘다니며(대학 부속 학교였다) 친구와 나란히 '마이마이'를 귀에 꽂고
꽤나 여유롭게 보냈기 때문에 공부를 '더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후회도 컸던 것 같다.
아무려나 재수를 하겠다는 나의 바람은 부모님과 담임의 협공으로 무산되고
결국엔 그날의 운명에 따라 내 인생이 결정되었다.
다른 길로 빙빙 돌아서라도 다시 지금 이자리에 와 있을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날 본 학력고사 점수가 조금 더 높았고 내가 원하는 학교와 학과에 갈 수 있는 상황이
되었거나, 혹시 시험을 더욱 잡쳐 완전히 형편없는 점수가 나와 또 다른 전공을 선택해야 했다면
정말로 전혀 다른 인생이 펼쳐졌을 것 같다.
나의 과거와 견주해보면, 학력중심주의 사회에서 청소년들의 인생은 정말로 수능시험 하루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그들에게 "수능시험이 니 인 생의 전부는 아니란다"라는 섣부른 충고는 해주기 어렵지 않을까.
물론 수능시험을 거쳐 좋은 대학을 가도 취업경쟁의 지옥으로 편입되어야 하는 그들의 삶을 예견하면 더욱 암담하다. 현실은 수능이 청소년들의 미래와 인생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 분명하고 그래서 이 나라 교육열이 좀처럼 식지 않고 있을 것이다.
수능고사장을 나온 아이들이 지금쯤은 해방감에 휩싸여 활짝 웃고 있을지,
아니면 과거의 나처럼 눈물바람을 비치며 방구석으로 숨어들지
그들의 무거운 어깨를 생각하니 내 가슴도 묵직하다.
듣기평가 시간엔 전국에서 비행기도 못뜨게 하는 나라로 세계에서 유일하다는 얘길 들은 것도 같은데
사실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암튼 해마다 시끄러운 수능 열기를 지켜보며 늘 나의 과거가 떠오른다.
물론 나때는 학력고사였다.
"니들의 대학 수준에 따라 남편감과 팔자가 달라진다"고 서슴없이 말하던 무서운 선생들의 압력이 아니어도
겨우 하루 시험에 12년 공교육의 향방이 갈린다는 게 참 억울했다.
푸는 것보다 찍는 것이 더 많은 수학과목 때문에 모의고사 점수가 늘 들쭉날쭉했던 나는
수학이 포함된 2교시 과목을 치르고 나서 이미 비감에 젖었었다.
때에 따라 10문제까지도 풀 수 있었던 모의고사 수학시험에 비해 실전에선 아는 문제가 딱 6개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아.. 난 수학이 정말 싫고 어려웠다 ㅠ.ㅠ. 그리고 정말로 발표뒤에 알게된 수학 점수는 딱 12점이었다! 번호 하나로 몰아서 찍었으면 차라리 좋았을 것을;;)
고사장은 서울 정독도서관 근처에 있는 풍문여고였는데
마지막 시험시간이 지나가고 문제지와 답안지 수거가 무사히 끝났으니 하교해도 좋다는 방송을 듣고
운동장으로 내려가자, 12월이라 이미 어둑어둑 날이 저물기 시작한 교정엔 하필
진추하의 One summer night이 흘렀다.
무척 슬픈 영화 <사랑의 스잔나>의 삽입곡이었던 그 노래 때문에 가뜩이나 우울한 심정은 더욱 극에 달했는데
설상가상 교문 앞엔 집에 있을 줄 알았던 엄마가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를 보자마자 나는 말도 못하고 그만 엉엉 울음을 터뜨렸고,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도 계속 훌쩍거렸다.
시험결과가 발표된 후 나는 내심 반드시 재수를 해서 더욱 좋은 점수를 손에 쥐겠다고 결심하며
똑같은 공부를 1년 더 하는데 어떻게 점수가 오르지 않겠나 반문했었다. ^^
사실 고3시절 나는 야간자율학습 시간에도 걸핏하면 떡볶이를 먹으러 내려가거나(학교가 산꼭대기에 있었다 ㅋㅋ) 꽤 넓은 대학교정을 쏘다니며(대학 부속 학교였다) 친구와 나란히 '마이마이'를 귀에 꽂고
꽤나 여유롭게 보냈기 때문에 공부를 '더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후회도 컸던 것 같다.
아무려나 재수를 하겠다는 나의 바람은 부모님과 담임의 협공으로 무산되고
결국엔 그날의 운명에 따라 내 인생이 결정되었다.
다른 길로 빙빙 돌아서라도 다시 지금 이자리에 와 있을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날 본 학력고사 점수가 조금 더 높았고 내가 원하는 학교와 학과에 갈 수 있는 상황이
되었거나, 혹시 시험을 더욱 잡쳐 완전히 형편없는 점수가 나와 또 다른 전공을 선택해야 했다면
정말로 전혀 다른 인생이 펼쳐졌을 것 같다.
나의 과거와 견주해보면, 학력중심주의 사회에서 청소년들의 인생은 정말로 수능시험 하루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그들에게 "수능시험이 니 인 생의 전부는 아니란다"라는 섣부른 충고는 해주기 어렵지 않을까.
물론 수능시험을 거쳐 좋은 대학을 가도 취업경쟁의 지옥으로 편입되어야 하는 그들의 삶을 예견하면 더욱 암담하다. 현실은 수능이 청소년들의 미래와 인생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 분명하고 그래서 이 나라 교육열이 좀처럼 식지 않고 있을 것이다.
수능고사장을 나온 아이들이 지금쯤은 해방감에 휩싸여 활짝 웃고 있을지,
아니면 과거의 나처럼 눈물바람을 비치며 방구석으로 숨어들지
그들의 무거운 어깨를 생각하니 내 가슴도 묵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