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뇌에 구멍이 뚫린 것 같은 시기를 겪는다.
창작 글쓰기를 하는 사람들은 텅 빈 모니터 화면에서 깜박이는 커서나
빈 노트 또는 원고지를 앞에 두고 그저 바라보며 막막함을 느끼는 때가 있다고 하는데
다행히도 번역은 누군가 써놓은 텍스트에 기대어 '글을 옮기는' 작업이므로
그들처럼 원초적인 막막함은 경험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한정된 용량의 두뇌에서 끊임없이 말을 꺼내 써먹다 보면
어느 순간 사고를 지닌 인간이 아니라 번역기계가 되어버린 자신을 느낀다.
성의없이 번역기로 돌려 생성해 놓은 어처구니 없는 정보를 보듯
풍요롭지 못한 어휘로 쥐어짜 놓은 문장들은 무미건조하고 단조롭다.
거기서 더 기계를 혹사시키면 아예 삐걱삐걱 고장 직전의 덜컥거림이 감지된다.
가령 이런 식이다.
어제는 trap이라는 단어를 보며 '함정'이라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뭐더라, 뭐더라, 내가 옮기려는 문장에 더 어울리는 우리말이 있었는데 뭐더라... ㅠ.ㅠ
자존심이 상해서 사전을 뒤져볼 생각은 안하고 계속 몇분째 trap을 째려보고 있으려니
정말로 내가 함정에 빠진 기분이 들었다.
마감을 앞두고 그런 걸로 소모할 시간이 없다는 생각에 자존심이고 뭐고 결국 인터넷 사전에 trap을 쳐넣으며
비감에 젖었다.
내가 쓰고 싶은 말은 '덫'이었다...
기계가 삐걱거릴 때는 심지어 요즘 초등학생조차 알 것 같은 기본단어 앞에서도 머리가 멍하다.
두개골 어딘가에 구멍이 뚫려 말랑말랑한 뇌가 뭉텅이로 녹아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원래 한 권의 작업이 끝나면 일주일쯤은 마감을 자축하며
시체놀이하듯 실컷 자고, 책방에 가서 읽든말든 일단 허영심을 채워줄 책도 좀 사오고, 굳이 '문화생활'이라고 하 것까진 없어도 영화를 보든 연극을 보든 공연을 보든 많이 보고 경험하고 느끼는 일종의 '자양분 섭취' 기간을 둬야 한다.
하지만 그간 개인적인 사정으로 너무 오래 지체된 일들을 한꺼번에 마무리하며 그런 여유를 부릴 순 없었다.
아니 집에서 무기력하게 빈둥거릴지언정 그런 여유를 부릴 시간은 없다고 미련하게 단정했다.
결국 미련함의 뒤끝에서 타격을 입는 건 자신임을 알면서 왜 이런 짓을 반복하는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번에 난 구멍은 꽤나 커서 메우기가 쉽지 않을 듯한데
사실 지금은 정말로 구멍을 메울 여유조차 없다.
당분간은 고장난 기계를 억지로 부려 써먹을 수밖에 없는 상황.
평생 공포영화는 제대로 본 적도 없는데 문득,
머리 뒤쪽이 절반쯤 날아간 것도 모르고 어정어정 걸어다니는 가엾은 영혼이 마치 내 모습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