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을 해서 밥은 먹고 살 수 있냐?"는 질문을 아직도 종종 받을 만큼
아직도 번역은 영어 좀 한다는 사람들의 전천후 아르바이트로 생각되는 경우가 많다.
이 업계(?)에서 꽤나 자리를 잡았다고 하는 나도 지난 몇년 간 연봉을 따져보면 그리 신통치는 않다.
물론 내가 게으름을 부려 제때 원고를 넘기지 못한 탓도 있지만, 간혹 번역료 지불을 마냥 지연시키고만 있는 몹쓸 출판사도 있고^^; 책이 출간된 후 1개월 이내 번역료를 지불하겠다는 계약서 조항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는데(대부분은 원고 넘기고 1개월 내 지불 조건이 많지만, 거의 원고를 넘기면 몇달 안에 책이 나오기 때문에 그러려니 했었다) 출간이 계속 미뤄져 출판사쪽에선 아주 당당하게 원고료를 안주고 버티는 경우도 간혹 만나게 된다.
전에도 얘기했지만 작가들과 달리 번역가는 원고료를 인세로 받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고
거의 대부분 번역원고의 양에 따라 단번에 결제를 받는 '매절 계약'을 하기 때문에
책이 어마어마한 베스트셀러가 되어도 단번에 떼부자가 되기는 어렵다.
백만부 넘게 팔린 그 유명한 '좀머씨 이야기' 같은 책을 번역하고서도 정작 번역가가 받은 돈은 대략 '80만원'(그 책이 얇고 텍스트가 짧았던 건 읽어본 분들이 다 아실 터;;)이 전부일 정도니까. ^^;;
게다가 번역이라는 것이 매일 꾸준히 작업을 한다고 해도 한달에 '몇 권씩' 빠른 시일 안에 해치울 수 있는 일이 절대로 아니고, 어떤 책은 자료 공부며 용어 확인 때문에 번역 기간이 6개월을 훌쩍 넘길 수도 있는 대단히 '노동집약적인' 일인데 열악한 출판계 사정상 언어권별로 정해진 번역료는 십년 가까이 '불변'이다.
따라서 제 아무리 부지런히 일을 하는 번역가라고 해도 별도로 다른 직업을(말하자면 번역 아카데미 강사라든지 대학 같은 데 출강을 나가는;;) 갖고 있지 않는 한 연봉은 뻔한 수준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번역가는 아주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프리랜서는 결코 될 수 없다. ^^
얼마 전 드물게 인세로 번역계약을 한 뒤 그 감회를 어딘가 적어놓은 기억이 나는데
그 출판사처럼 정직한 경영을 모토로 삼는 경우 번역 인세를 5% 주기도 하고
모 대학 출판부에선 6%로 계약을 하기도 했지만, 여건이 더 열악한 영세 출판사에서 책의 상업적 성공여부를 알 수 없는 상황에 인세로 번역계약을 하는 경우는 2-3% 인세가 대부분이라는 전언이다. (책의 정가가 만원이라고 할때 권당 인세는 2-300원이니 초판을 5천부를 찍는다 해도 옮긴이 손에 들어오는 돈은 150만원이하라는 얘기다. 물론 여기서 또 3.3% 원천징수세를 떼야 한다)
6%로 계약한 모 대학 출판부 책의 경우 세 사람이 공동번역을 한 터라 실질적으로 한 사람에게 떨어지는 인세는 2%^^였는데, 꽤나 정가가 비쌌던 그 논문집의 초판 1000부에 해당하는 인세를 처음 받았을 때 내 통장에 입금된 돈이 불과 삽십여만원이었더랬다. ㅋㅋ
그 책이 나온지 3년만인 올해, 또 2쇄 1000부를 찍었다며 지난달에 그에 해당하는 인세가 입금되었는데 어휴... 교수님과 세미나를 해가며 1년 가까이 공들여 번역한 그 책에 들어간 품과 에너지와 정성을 생각하면 정말 눈물이 앞을 가릴 금액이다. ^^;; (상업적인 책들은 그나마 다행히 초판을 3천부 정도는 찍는다 ㅎㅎ)
어쨌거나 그럼에도 이 열악하고 부가가치 낮은 직업인 번역을 천직으로 삼았으니
남탓할 일은 아니다. 그런 단점들을 모르고 시작한 것도 아니고 그냥 소박하게 살면 되지 않겠나.
그런데 최근 공연히 열받고 섭섭한 느낌을 금할 수가 없는 일들이 있었다.
과거에 출간되었던 책들이 새로운 꾸밈새로 신간인듯 세상에 선을 보인, 이른바 '개정판'을
뜻밖에 만나게 된 것.
법적으로 번역원고에 대한 모든 권한을 출판사에 넘긴다는 계약서를 작성하고 일을 했으니 출판사에서 개정판을 낸다고 나에게 미리 통보할 이유도 없는 것이고, 나로선 사실 아무 권한도 없음을 알면서도 왜 그렇게 기분이 구리고 찜찜하고 '아까운'지 모르겠다.
요즘 출판사들은 대형화를 추구하면서 회사 이름도 분야에 따라 여러가지로 나누어 마치 다른 회사인 것처럼 책을 출간하는 것이 유행인데
9월에 나란히 개정판을 선보인 나의 자식(?)들도 얼핏 보기엔 처음과 다른 출판사에서 표지를 바꿔 낸 듯한 느낌이었다.
하물며 한 권은 대형할인마트에서 야심차게 기획한 '핸디북' 시리즈의 일환이어서 작은 판형에 종이도 재생지를 사용해 가격을 낮췄다는데, 대체 어느 인간이 기획을 했는지 모르겠으나 판형을 작게 하다보니 표지 디자인도 단순하게 만드느라 모든 시리즈에서 '감히' 옮긴이의 이름을 표지에서 빼버렸다. -_-;; (표지에서 내 이름이 사라진 그 책을 접하고 발끈 화가 나는 것을 느끼고서야 내가 이렇게 공명심에 집착하는 인간이었음을 새삼 깨달았다ㅎㅎ)
그 개정판의 출간에 관하여 내가 옮긴이로서 출판사에서 받을 수 있는 최대한의 (그리고 공식적인) 예우는 새로 나온 책의 증정본을 받는 것뿐이다.
물론 9월에 나온 그 두 책의 증정본은 아직 받지 못했고, 저들이 잊지 않고 나까지 챙겨 보내줄지 그것도 미지수다. (둘 다 원고료 때문에 무던히도 나에게 애를 먹인 곳이라 내쪽에서 다시 연락하기도 싫은데, 그렇다고 내 돈 주고 책을 사기도 아깝다! ㅋㅋ)
문득 내가 옮긴이가 아니라 지은이였다면;;;
인세를 따로 챙기는 것은 물론이고 "개정 증보판에 붙여"라는 발문이라도 청탁받느라 미리 상황을 알았겠지 싶어지면서 잠시 우울했다.
허나 어쩌랴.
'작가'가 될 역량이 모자라 남의 글에 기대 사는 옮긴이의 삶을 선택한 것이 내 운명인 걸.
공연한 욕심에 속쓰려하지 말고 밀린 일이나 열심히 하라는 채찍질의 의미로
길게도 끼적였다. (그래도 느껴지는 이 억울함은 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