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기록부

추억주머니 2007. 9. 10. 17:53

계속되는 정리의 일환으로 어젠 장롱 깊숙이 들어 있던 누런 봉투 하나가
오랜만에 빛을 보았는데
놀랍게도 그 안엔 우리 삼남매의 옛날 상장과 성적표, 심지어 생활기록부 사본까지 들어 있었다!

사람은 역시 기억하고 싶은 부분만 기억하거나 진실을 왜곡해서 머리에 새겨두는 게 맞나보다. 옛날 성적표 뒷칸에 '행동발달 사항'을 적는 난이 있었던 건 기억해도
학년 바뀔 때 생활기록부 사본을 나눠준 건 전혀 기억에 없었는데... 이상했다.

연예인들이 나와서 학창시절 친구를 찾는 프로그램에서 제일 먼저 생활기록부의
'행동발당 사항' 부분을 카메라가 비춰주는 건 아무래도 그게 제일 재미있기 때문인듯
누렇게 바랜 종이에 심각한 표정의 촌스러운 사진까지 복사된 생활기록부를 보며
나 역시 킥킥 웃어댔다.
우리 삼남매를 맡았던 담임들은 그다지 창의성이 없는듯 내용은 거의 뻔하다.
"학습태도가 좋고 성격이 온순하여 친구가 많음"
"소극적인 성격이나 매사에 노력하는 모습을 보임"
"교우관계가 좋고 남을 잘 도우며 학급 일에 성실함"
"학습태도는 양호하나 좀 더 학업에 노력을 요함"
뭐 이런 식이라는 거다.

옛날 선생님들은 몇가지 경우의 수에 따라 생활기록부 문구를 정해놓고 있다가
그 중에서 골라 골라 적은 건 아니었을까?
어쩌면.. 초, 중, 고 선생들의 표현 능력이 다 거기서 거긴지...

나 역시 한때는 (물론 아주 잠시) 변태 같은 선생들이 판을 치는 학교에서
꽤 쓸만한 교사가 되어보겠다는 꿈을 꾼 적도 있었지만 (교생실습도 나갔었다 -_-V)
무서운 아이들을 떼로 앉혀 놓고 뭔가를 가르친다는 게 나로선 역부족임을 깨달았던 것 같다.
중학생 여자애들도 무서운데(당시 중1 여학생반을 맡았는데, 나보다 작은 애들이 딱 2명 뿐이었다 ㅠ.ㅠ) 남학생들이나 고등학생은 도저히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나도 잘 모르는 영어과목을 가르치는 건 더더욱 말도 안되는 일 같았는데,
지방으로 발령이나 집에서 '당당하게' 독립하는 아련한 로망을 제외하면
교사의 가능성을 포기한 건 참 잘한 짓이라고 생각한다.

더욱이 나처럼 수 개념이 바닥인데다 손가락과 두뇌의 상호작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계산기조차 잘 다루지 못하는 내가
반 아이들 성적 채점하고, 계산하고 평균 내고 그러려면 얼마나 괴로워하며 피눈물을 흘렸을까! (요새야 전산화 프로그램이 있을 것 같기도 하다마는;;)
그런데 너무 뻔한 생활기록부 내용을 보고 있으려니, 나라면 다른 건 몰라도 성적표와 생활기록부에 적는 아이들의 특징에 대한 건 좀 성의 있게 써주지 않았을까 싶어졌다.
하긴... 나 역시 잡무에 치여 판에 박힌 글귀들을 골라 베꼈을지 또 알 수 없는 일이긴 하다.
 
요새도 선생들이 판에박힌 글귀들을 생활기록부와 성적표에 적어보내는지 어쩐지
문득 궁금하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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