땜빵

삶꾸러미 2007. 8. 26. 15:28

간만에 땜빵질로 바쁜 이틀을 보냈다.
이 나이에 소개팅 땜빵을 나갔을 리는 없고 ^^;; 급한 일 마무리에 동원됐단 의미다.
언제부턴가 거절을 못해 맡은 일 때문에 다른 일까지 크게 피해를 입는 사건을 연이어 겪은 이후로는, 일 면에선 워낙 잘난 체를 하는 터라 이젠 감히 내게 땜빵을 요구하는 이들이 드문데 가끔 동생놈이 무대포로 들이미는 일이 있다.

EBS 영화쪽 일이 워낙 번역료가 낮아서
일이 좋아 선심 쓰는 셈치고 한다는 생각이 없으면 사실 꾸준히 하기가 좀 억울하다. ^^
한 8년 가까이 한동안은 일부러 짬을 내서라도 한달에 한 두 편은 EBS 영화 번역을 했지만
출판계 쪽 계약건만으로도 일에 치여 짬을 내기 힘들어진 다음부턴 아예 동생에게 말도 못꺼내게 했었다.

그렇지만 동생 놈 회사 일에 간혹 펑크가 난다거나, 번역 감수에서 걸린다거나
단기간에 번역이 쏟아지는 다큐멘터리 축제 기간 같은 때는 어쩔 수 없이 도와야한다.
아쉬울 때 동원되어 도움을 줄 수 있는 건 역시 핏줄이라나 뭐라나.. 쳇..

하여간 이번에 땜빵을 하게 된 건 포도주 산업에 관한 다큐멘터리 물.
총 130분 이상의 길이였는데, 번역하는 사람이 둘로 나뉜 테이프의 뒷부분은 아예 있는줄도
모르고 일을 넘겨 뒷부분 40분 정도 분량을 새로이 작업해야 하는 상황.
기막히게도 방영일자가 오는 화요일이란다. ㅋㅋ
원래 번역한 사람은 일요일에나 추가 번역 대본을 보내줄 수 있다고 했다는데
자막 편집 작업을 해서 납품하고 검수까지 받으려면 늦어도 토요일 오후까진 번역대본을 넘겨야한다는 것이 동생놈의 요구사항.

책이든 영화든 원래 그간 내가
번갯불에 콩구워내듯 빨리 "해치우는" 번역에 동원된 경험이 많긴 하지만
이번엔 좀 겁이 났었다.
컴퓨터 앞에 1시간 이상 오래 버티고 일에 집중할 수가 없게 된지 어언 석달이 다 되가는
시점이기 때문.
양쪽 발등에 불이 떨어져 활활 타고 있어도 뜨거운 줄 모르고 있는 내가 아닌가 말이다. -_-;;

프랑스어, 포르투갈어, 이탈리아어, 영어가 마구 혼용된 다큐멘터리를
영어대본을 중심으로 작업하고, 눈치껏 테이프 보며 시간 맞춰 자막 길이 조절해서 한글 대본을 정리하는 과정은 예상대로 역시나 난항이었고
(번역 자체에 걸리는 시간보다, 때로는 TCR이라고 해서 작업용 테이프에 편의상 넣어놓은 시간을 보며 자막 길이 조절해 다듬는 시간이 더 걸리는데, 이번 작업은 뭔소린지 모를 외국어들의 총본산인데다 앞사람이 번역한 부분과 용어까지 통일하려면 앞부분도 죄다 다듬어야 했으므로 "겨우 40분 분량"이라는 말에 덜컥 일을 맡은 걸 죽도록 후회했다. ㅠ.ㅠ)
하필 메일로 받은 일부 원어 대본이 누락되는 바람에 오밤중에 생쇼를 거쳐 최종 마무리까지... 그야말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어쨌든 결론적으로 땜빵일은 무사히 토요일 오후에 끝이 났다.
어느덧 거대자본주의와 상업주의에 휘둘리게 된 유럽과 미국, 남미 포도주 산업을 조명한 다큐멘터리 내용도 좋았고, 무엇보다 내가 다시 "빡세게" 몰아쳐서 일을 할 수 있게 됐음을 확인한 것이 큰 성과인 듯하다.

물론 알량하게나마 그것도 마감이라고, 어제 오후 이후 '번역일'은 단 한자도 하기 싫은
후유증에 시달리고는 있지만 슬슬 워밍업을 거쳐 본격적인 "마감성 번역기계 작업모드"로 돌입할 수 있는 날이 그리 멀지 않은 것도 같다.

동생놈한테는 바가지로 욕을 퍼부어주기는 했지만(아마 이번 원고료도 대충 떼어먹겠지;; 큭)
이래저래 나름 보람있는 땜빵질이었던 듯하다. ^^;; (흠.. 근거없는 나의 낙천주의도 서서히 부활하고 있는 모양이닷!)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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