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간의 직딩생활 동안 나는 주로 땡순이였다. ^^;
여기서 땡순이란,  퇴근시간을 가리키는 마음속의 종이 '땡' 울리는 순간 곧장 퇴근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그렇다고 퇴근 5분전에 미리 모든 준비를 마쳐놓는 파렴치한은 아니었다.
마지막 회사는 '여직원' 유니폼도 입어야 하는 곳이어서 미리 퇴근 준비를 하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암튼, 내가 그 회사에서 몸바쳐 일해도 나를 키워줄 곳은 정녕 아니라는 판단을 내린 후부턴 가능한 한 땡순이 생활을 고집했던 것 같다.
땡순이의 습관은 물론 첫번째 회사에서 비롯됐다.

어리버리 취업준비는 제대로 안하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거의 매일 술만 퍼마셔 대던 4학년 2학기에 덜컥 취업이 되는 바람에 정신없이 시작된 나의 사회생활은 집에만 가면 9시부터 뻗어 잘 정도로 고되고 힘겨웠다.
처음엔 일보다 영어 스트레스가 제일 심했던 것 같다. ^^;; 미국 회사 서울 사무소였으니까.
암튼 처음 사회생활을 하면서 제일 좋았던 건 취업을 한 다른 친구들과 달리 퇴근시간이 몹시도 정확하다는 거였다.
자기 일이 끝나면 지점장이든 상사든 눈치보지 말고 퇴근해도 된다는 것이 그곳의 분위기였고 신입사원이라 할일도 별로 없던 나와 동기는 그야말로 땡~ 6시만 되면 가방 들고 사무실을 나섰다.

가끔씩 본사에서 사람들이 나오면 야근과 철야, 주말출근도 밥먹듯이 해야 했지만, 그렇게 한두 달 정도만 고된 나날을 보내면 또 다시 땡순이의 삶이 가능했다.
그게 가능했던 건 어디까지나 본사에 있는 사장의 경영철학 때문이었다.
그는 늘 야근을 하는 사람은 일을 못하는 사람이라고, 시간 관리를 제대로 못하느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
물론 그건 퇴근시간 다 되서 일감을 던져주는 악덕 상사들의 존재를 예외로 두고 하는 말이었지만, 회사 분위기 상 그땐 무작정 무식하게 해놓으라고 몰아부치거나 퇴근 직전에 일감을 던져주는 불합리한 일은 없었다. (나중에 들어간 한국 회사에선 비일비재했지만 ㅠ.ㅠ)

습관적인 야근을 곧 게으름이라고 여기는 독특한 유태인 사장은 장난기가 발동하면
가끔 6시 넘어서 전화를 걸어 우리가 받으면 버럭~ 왜 아직도 퇴근 안했냐고 호통을 치기도 했다.(자기는 그 시간에 뉴욕 본사에 나와 있으려면 생새벽 출근을 했다는 뜻인데, 왜 그리 일찍 출근하느냐고 물으면 맨해튼 러시아워 탓을 했다 -_-;;)
물론 어쩔 수 없이 야근을 해야 하는 경우가 있기는 했지만, 아침부터 후다다닥 바쁘게 움직여 그날 하루 해야할 일은 미리미리 해치우는 게 정말로 효율적이란 걸 배울 수 있었다.
다행히 그땐 개인 pc가 없을 때라 정말로 책상에 앉아 죽어라 일만 했던 것 같다. ^^;

그런데 분위기가 확실히 다른 한국회사로 옮기고 보니
컴퓨터가 슬슬 사무실을 장악하고 있었고, 오전내내 탱자탱자 놀다가 오후부터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해 야근을 너무도 당연시하는 분위기였는데, 전날 퍼마신 술 때문에 오전 내내 사우나에서 놀다 들어와 뒤늦게 일 시키는 걸 당당하게 생각하는 '남자' 상사들에게 나는 완전히 싸움닭이 되고 말았다.

뒤늦게 그 회사가 인수합병을 당하고(당해도 싸다!)
좀 더 큰 규모의 회사로 흡수되면서, 거금을 들여 생산성 향상을 위한 컨설턴트의 자문 결과 다행히 야근필수 분위기는 정규 근무시간에 생산성을 최대로 높여야 한다는 방향으로 전환될 수 있었다.
물론 성질 급한 '경상도' 출신 상사들의 터무니없는 닥달(오후에 대뜸 "오늘 퇴근하기 전까지 *** 실적 뽑아와라!"라든지)은 가끔씩 이어졌고
시차 때문에 다 저녘때 내가 영국으로 보낸 팩스의 답이 "URGENT!" 도장이 찍혀 곧장 삐직삐직 들어오면 울며 겨자먹기로 야근을 해야하는 일도 있었지만 대체로 나는 땡순이란 별명에 어울리는 삶을 보냈던 것 같다.
그땐 일주일에 하루 이틀은 꼭 야근을 하는데도, 땡순이로 불리는 게 억울했지만^^;;
부당하게 야근을 강요하는 분위기에 '온몸으로'(?) 항의하는 '싸움닭 땡순이 미스 ㅂ'의 지랄맞은 성깔을 1년쯤 겪어본 회사 사람들은 그럭저럭 내 주장을 인정해주었더랬다.


흠....
난데없이 땡순이의 추억을 돌이켜 본 까닭은
요즘의 내가 너무 한심스러워서다.
작업실 출근 시간은 나날이 늦어지고 (오늘은 무려 오후 3시 반에 출근했다 ㅠ.ㅠ)
더불어 퇴청시간도 계속 늦고 있다.
물론 집에 돌아가서도 이어지는 야근(?)과 철야는 기본이다.
그럼, 돈 들여가면서 작업실은 왜 얻었는데!! -_-;;;
낮밤을 거꾸로 사는 올빼미의 삶을 추구한다고는 해도, 생산성과 능률면에서도 요즘은 도무지 진도가 봐줄 수 없을 정도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은 하루 15시간도 넘는 것 같은데, 정작 열심히 일하는 시간은 손꼽아보기도 민망하다. ㅠ.ㅠ
인터넷의 바다에서 헤엄치는 시간을 확 줄이기만 해도 내가 만날 이렇게 아등바등 살지는 않아도 되련만...

타인의 강요가 아니더라도 자기관리가 철저한 사람이 되고 싶다. (만날 말로만;;;)
하지만 이렇게 살면 소박하고 화끈하게 바짝 벌어서 소박하고 화끈하게 바짝 놀고 여행하며 살겠다는 나의 바람은 그야말로 공허한 바람으로 끝나고 말지 않겠나.
으휴...
그런데도 밀린 일은 관두고 좀전에도 여행 사이트나 실실 돌아보았다.
'땡순이 미스 ㅂ'의 철저한 시간관리가 여실히 필요한 때다. ㅠ.ㅠ

Posted by 입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