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눈

삶꾸러미 2007. 5. 18. 16:21

어떤 유전자가 작용하는 건지는 몰라도
길눈이 밝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길눈이 어두워 이른바 '길치'로 분류되는 사람이 있다.
한번 간 길은 단박에 찾아가거나, 대강 설명만 듣고도 별 어려움 없이 찾아가는 신공을 발휘하는 사람도 있고, 여러번 간 길도 매번 헷갈려하며 헤매는 사람이 있는 법.
내 주변엔 길치들이 꽤 된다.
대표적으로 우리 아버지.
과거에 친척들 집에 갈 일이 있어서 퇴근길에 따로 찾아오시게 되면, 아버지는 몇번 가본 곳인데도 늘 엉뚱한 곳에 가서 헤매고 있기 일쑤였다. 심지어는 전철역까지 다른 곳에서 내려 이상스럽다며 한시간도 넘게 낯익은 골목을 찾아 들쑤시고 다니기도 했더랬다.
지금은 아예 내가 늘 모시고 다니지만, 그때마다 두분이 자동차 뒷좌석에서 중얼중얼 염려를 하신다. "나 혼자 여기 두고 가면 집에 못찾아간다..."고.
아버지가 지금도 약속시간보다 최소 30분, 많게는 1시간씩 일찍 가는 버릇이 생긴 것도 아마 하도 길치라 잘 못찾아갈 것을 염려해 시간 여유를 두기 시작하면서 비롯된 듯하다. ㅋㅋ

ER 동호회로 알게된 녀석들도 손꼽히는 길치여서,
9년째 변함없이 모임장소는 종로 탑골공원이다.
몇번 그 주변의 다른 곳으로 만나는 장소를 바꿔봤지만, 워낙 약속시간도 잘 안지키는 인간들이 엉뚱한 데서 헤매기 일쑤라 이젠 장소를 바꿀 생각은 하지도 않는다.
종로3가 전철역에서 나와 탑골공원 오겠다고 택시를 타는 놈이 없나
탑골공원 오랬더니 종묘에서 마냥 기다리는 녀석이 없나
일단 만났더라도 인파속에서 서로 헤어지면 방향감각 없는 녀석들이 도무지 찾아올 줄을 몰라 휴대폰 통화를 하며 숨바꼭질을 해야 하니, 그 소문난 길치들을 만나면 어린이집 학생들 소풍 데려나간 선생처럼 늘 두리번거리게 된다. +_+;;

다행히도 나는 공간감각력이나 복합적인 지각능력이 떨어지는 인간임에도
길눈은 밝다. 한번 갔던 곳은 웬만해선 찾아갈 수 있기도 하고, 대강 지리를 머리에 그려보면 방향감각을 발휘해 좀 헤매더라도 완전히 엉뚱한 곳으로 가게 되진 않는다.
처음 가는 곳도 네비게이션의 도움 없이 설명만 잘 들으면 별 어려움 없이 찾아가기 때문에 다들 꽤 신기해하는데, 나는 똑같은 설명을 듣고도 잘 못찾아오는 사람이 오히려 신기하다. *_*

길치의 유전인자나 사고방식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길치들은 길을 설명하는 것에도 당연히 둔하다. ^^ 아마도 주요 지표가 될만한 건물이나 표지판 따위를 허투루 보고 지나치기 때문인 것도 같은데...
암튼 만날 다니는 자기 집엘 데려가면서도 자동차 조수석에 앉아 갈팡질팡 설명을 헤매는 길치들을 보면 놀라울 정도다!

마지막 회사에 다니던 시절, 누군가에게 전화로 사무실 오는 길을 설명해야 하는 일이 생기면 나는 늘 호출을 당해야 했다. 만만한 거래처면 미리 팩스로 약도를 보내주면 끝이지만, 웃기는 상사들은 누군가와 막 통화를 하다가 말고 '미스 ㅂ!"이라고 꽥 소리를 질러 나를 불러선 수화기를 내밀곤 했다. -_-;; "이 사람한테 우리 사무실 오는 길 좀 가르쳐줘라" (나한테 그런 걸 시킬 정도의 상사면 대개 반말이다)
나보다 길을 더 잘 아는 영업부 직원들은 대개 오전부터 온종일 외출중이었고, 사무실에 남는 건 주로 여직원과 간부들이니 그 중에 '구두 약도 설명'을 시키기에 제일 만만한 건 나였다.
내가 운전을 오래 한 탓도 있었지만, 상사들 본인도 운전경력이 나보다 길지만 늘 다니던 길도 막상 설명하는 덴 젬병이었던 것 같다. 아마도 그들은 표지판을 제대로 안보고 다니는 모양이다.
하지만 난 운전하기 전에 버스 타고 다닐 때도(내가 지하철보다 버스를 더 선호하는 이유도 방향감각을 잃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시청앞에 횡단보도가 생겨 다행이지만... 예전에 횡단보도 없을 땐 걸핏하면 내가 나가고 싶은 출구로 못나가고 실패해 화가 버럭~ 났었다) 주변 풍경을 열심히 관찰했기 때문에, 그런 경험조차 나중에 길을 찾아갈 때 도움이 되었고 지금도 어딜 가든 길거리와 사람들을 유심히 살핀다. 다 나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정보란 말이지... (뭐 딱히 그런 생각을 품을 만큼 주도면밀하다기 보다는 그냥 세상구경에 관심이 많다 ㅋㅋ)

길눈에 꽤 밝다는 잘난 체 정신 때문에 나는 차에 네비게이션을 달 필요를 느끼지 않고
있더라도 주절주절 떠드는 게 시끄러워서 끄고 지내는 경우가 많을 것 같다.
게다가 운전하며 네비게이션 화면 살피는 거, 운전중 휴대폰 통화보다 더 위험하다고 들은 것 같은데?!
멀리 여행을 가거나 처음 가는 곳을 찾아갈 때, 나는 설명을 들을 수 있는 경우 그대로 메모했다가 안내대로 찾아가고, 그게 아니면 미리 지도를 찾아보고 주요 지표가 되는 고속도로 나들목이나 지점 따위를 적어둔다. 혹시 미리 계획하지 않았던 곳을 찾아가게 되더라도, 지도를 찾아보면 그리 어려울 것도 없다. 물론 우리나라 도로 특성상 표지판이 간혹 있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갑자기 사라지는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그럴 땐 동물적인 감각으로 찾아내면 되는 거다.
대부분 길은 어디로든 뚫려있고, 혹시 막다른 곳에 다다르더라도 되돌아오면 되는 거니까!

암튼...
오늘 막내 조카의 돌잔치를 앞두고, 어제부터 줄곧 전화통에 불이 나고 있다.
장소가 광화문 대로변에 있으니 어려울 것이 없는 데도, 며칠 동안 두 노친네에게 그리도 열심히 교육을 시켜놨건만 못미더워하는 친척분들이 계속 나를 찾아 위치를 다시 묻는다. -_-
제 아무리 네비게이션이 못미덥다지만 오지도 아니고 완전 도심인데  멀쩡히 새로 단 네비게이션을 두고도 길을 되묻는 동생들에게 이유를 물으니... "인간 네비게이션(=바로 나)이 더 훌륭해서"란다. 큭...

하긴 네비게이션 안내는 방향만 지시할 뿐, 방향을 바꿔야 할 지점에서 보이는 건물이 검정색인지 초록색인지, 그 앞에 커다란 조각상이 있는지 없는지, 가로변 공사장 펜스가 몇미터쯤 되는지를 설명해줄 순 없겠지.
아마 이따가도 또 다시 근처에 왔으니 길을 설명하라는 친척들의 전화를 꽤나 여러번 받아야 할 거다. 다 쓸데없이 길눈이 밝은 탓이니 어쩌랴. 친절하게 설명해드리는 수밖에.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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