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력

아픈 손가락 2018. 5. 29. 16:44

기억력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으나, 이젠 그런 말을 하기 민망하다. 책이나 영화 제목, 배우 이름, 여행갔던 장소... 머리속에 이미지로는 맴도는데 콕 찝어서 원하는 말을 입밖으로 꺼내놓기 힘든 순간들이 점점 많아진다. 걸핏하면 그거 뭐지...라며 말 꺼내는 친구들 놀리던 게 불과 1, 2년 전이었건만... 그 영화 뭐지? 로드무비, 여자 친구 둘이 마지막에 벼랑으로 차 몰고 떨어지는 거... 아, 그거.. 그게 뭐더라. 키 큰 여자 둘이... <델마와 루이스>? 맞다! 근데 그 배우 이름이 뭐였지? 수잔 서랜든이랑.... ㅠ.ㅠ... 

결국 이날 친구들과 나는 포털사이트 검색 찬스를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나 데이비스가 도저히 생각이 안나는 거라! 에효...  

오십대 초반인 내가 이럴진대 칠십대 후반인 왕비마마의 기억력이야 점점 나빠지는 게 당연하다. 뭐든 깜빡깜빡 하는 건 중노년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이려니 해야할 것 같다. 한 얘기 또 하고 또 하고... 반복되는 이야기를 싫어한다고 부르짖으면서도 엄마도 나도 도돌이표 같은 이야기와 하루 일과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게 사실이다.

암튼... 기억력이 부쩍 떨어진 건 그러려니 하겠으나, 원래도 조울증 환자라 늘 조마조마한 울 엄마의 경우 지난 봄 환절기를 지나며 퍽 염려스러운 상황이 많았다. LA 친구가 우리집에서 한달 기거하며 무수리 딸이 노상 밖으로 놀러다니느라 약간의 방치를 했던 상황이 노친네에게 녹록치 않아 스트레스가 많겠거니, 나름 감안하더라도 일단 화가 너무 많아지셨다. 

친구와 나는 그래도 나름 하루 건너 한번씩은 종일 집에서 뒹굴며 보필한다고 했는데, 딸 친구가 있건 없건 아랑곳하지 않고 버럭 화를 내거나 짜증을 부리는 순간이 많았다. 워낙 남의 시선과 이목을 신경쓰는 타인지향적 태도를 일관해오신 분으로선 의아할 정도였다. 모녀간에 서로 혹독한 언사를 던지는 건 일상 다반사지만 ㅠ.ㅠ 아무리 한달째 기거하는 동거인이라고 해도 딸 친구에게 막 대하실 분은 아닌데... 

본인도 기억력이 많이 떨어진데다 감정 조절이 잘 안되는 것 같다는데 동의했고, 결국 인지능력검사를 의뢰했다. 울 엄마를 포함한 모든 노인들의 제1공포가 치매에 걸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나도 모르게 잃어가다 결국 자신도 알아보지 못하게 되는 질병이 다 있다니, 어휴 참 끔찍한 일이다. 원래도 엄마는 6개월에 한번씩 보건소 부설 치매지원센터에서 인지검사를 스스로 해보시는 분이다. 그래서 100에서 7을 연속으로 빼는 연산이라든지, 오각형 두개를 겹쳐놓은 그림을 따라 그려보는 테스트 같은 건 아예 암기할 정도다. 아마 나 보다 더 빨리 대답하고 그릴 걸!

친구의 말로는 정밀 인지능력검사는 본인과 보호자 둘 다 문진을 한다고 해서 (그날 먹은 아침 메뉴라던지, 인척들 가족관계, 인생의 큰 사건 같은 게 정말로 맞는지 따로 물어 서로 대조해본다고 한다) 나도 기대하고 있었는데, 뭔가 단계가 다른 테스트였던 듯 세브란스 병원에선 환자만 1대1로 상담을 했다. 울 엄마의 말로는 보건소에서 하는 무료 인지능력검사와 크게 차이도 없었다는 것 같다. 괜히 비싼 검사비만 버렸다고 하심. 진짜 그런지는 나로선 확인할 길이 없으나 그래도 1시간 가까이 진행된 설문이 설마... +_+ 솔직히 나는 뇌사진도 찍어보자고 그럴 줄 알았는데, 문진으로 끝나는 게 좀 의아했다. 물론 울 엄마 상태가 그리 나쁘지 않으시다는 방증일 수도 있겠다.

암튼 일주일간 두근두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주치의 상담을 기다렸다. 검사 당일 불안초조해서 그런지 워낙 잠을 설치고 가셨기 때문에, 결과가 좀 나쁘더라도 그러려니 하시라고 컨디션에 따라서 기억력은 크게 좌우된다고 엄마에게 미리 당부한건 곧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자고.

드디어 정기검진 날, 검사 결과가 어떻느냐는 우리 질문에 의사는 '좀 애매하다'고 웃으며 답했다. 보통 동년배 평균 기억력보다 30% 이상 떨어지면 초기 치매 판정을 하는데, 울 엄만 15% 쯤 떨어지셨단다. 100명 중에 50등 하면 되는 건데;; 끝에서 20등 정도 한다고 보면 된다는 설명. ^^; 그래도 기억력이 떨어진 건 맞으니 너무 충격은 받지 말고 '뇌 영양제'라고 생각하며 일단 기억력에 도움이 되는 약을 먹어보라고 했다. 치료도 가능하고 더 좋아질 수 있는 것이니 염려 마시라고. 학창시절에도 그다지 우등생이 아니었던 덕분인지, 엄마도 쿨하게 꼴지 아니면 됐지 뭐, 그나마 다행이네, 하는 반응이었다. 

처방 받은 '뇌 영양제'를 일주일간 먹어본 엄마는 확실히 기억력이 나아진 것 같다고 평했다. 흐린 날이면 아침인지 오후인지 분간도 잘 못하고, 너 어디 나간다고 했지? 똑같은 질문을 5분 안에 3번씩 하던 증세도 없어진 것 같았다. 환절기를 벗어나면서 전반적인 심신의 컨디션도 좋아졌으니 약의 도움만으로 그렇게 된 건 아닐 수도 있었다. 나 역시 불면에 시달리고 나면 시력이 떨어져 눈도 잘 안보이고 머리가 멍해져 귀도 잘 안들린다. 평소에도 안경을 빼고 있을 땐 전화 통화할 때 상대 목소리가 잘 안들리는 걸 뭐. ㅠ.ㅠ 

문제는 그 '뇌영양제'만 먹으면 엄마가 악몽을 꾼다는 것이었다. 아침 식후와 자기전에 한 알씩 드시는데; 그 약을 먹고 나선 눈만 감으면 무서운 것들이 나타난다고 한다. 심지어 하루는 꿈속에서 괴물(=이불)과 싸우다 침대에서 떨어지셨다. 젠장!

그간 엄마도 나도 바닥애호가라 침대를 사용하지 않았었다. 침대에 누우면 허공에 붕 뜬 느낌? 호텔처럼 집보다 천장이 높은 곳이라면 몰라도.. 특히 한여름엔 서늘한 바닥에 보송하고 푹신한 요를 깔고 자야 숙면을 취할 수 있는데! 암튼 그러나 엄마는 팔다리 근력이 떨어지면서 바닥에 앉거나 누웠다가 몸을 일으키는 것이 어려워졌다. 더욱이 자다말고 선잠이 깬 상태에서 화장실에 가려면 젊은 사람들도 휘청거리기 일쑤인데;; 노년의 엄마야 오죽하랴. 컨디션 안 좋을 때 자다가 화장실 가려고 일어났다 몇번 바닥에 나동그라져 멀리서 내 이름을 외쳐 불렀다는데, 밤샘 작업 중이라면 그 소리를 듣고 달려가겠지만 나도 쿨쿨 자고 있을 때 그 소리가 들릴 리가 있나. 

해서 결국 엄마 방에 침대를 놓아드리고는 혹시나 떨어질까, 평소 쓰시던 라텍스 매트리스를 옆에 깔아놓았었다. 노인일수록 자다 깨서 화장실에 가는 일이 잦을 수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다리만 내려뜨리고 자리에서 일어나기 쉬운 침대 생활이 필수라지만... 노인의 낙상 문제는 어휴.. 정말 흔하게 발생한다고 한다. 다행스럽게도 1달간 매트리스를 깔아놓고 지켜본 결과... 엄마는 침대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워낙에도 잠버릇이 험하고 몸부림을 치며 돌아다니고 주무시는 편인데 침대에서 자면 구석본능이 생겨나 벽에 기대 잔다던데 정말인가? 신기해하며 드디어 두툼한 매트리스를 내방으로 치웠다. 

그러나... ㅠ.ㅠ 매트리스를 치운지 1주일도 되지 않아 엄마는 아침 나절에 침대에서 TV를 보며 노닥거리다 깜박 잠이 들어 결국 낙상을 하셨고 (내가 그렇게 누워서 TV보지 말라고 일렀거늘!!! 으으으) 2번 갈비뼈가 골절됐다. 갈비뼈는 부러져도 깁스를 하지 않는다. 그냥 생활을 조심하며 뼈가 붙기를 2달쯤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침대 낙상사고가 4월 말의 일이었는데... 가뜩이나 충격을 조심하라고 했었는데... 그놈의 '뇌 영양제' 후유증(아마도)으로 꿈결에 괴물과 싸우느라 엄마가 보름 만에 침대에서 또 떨어진 거다! 어휴....

당연히 내 임의로 뇌 영양제는 그만 드시라고 했다. 대신에 온종일 누워 있지 마시고 제발 운동 좀 하시라고! 노인들은 근육에 힘이 워낙 금방 빠져서, 며칠만 누워 있어도 다리가 홀쭉해진다. 그러니 걷는 게 더 힘들어질밖에... 그래서 가파른 계단을 올라와야하는 집에서 밖으로 나서는 걸 엄마가 더 힘들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서 재건축을 하든 이사를 가든 엄마가 더 연로해지기 전에 환경을 바꾸고 싶은 마음인데, 현실이 안 따라주니 괴로울 따름이다. 

우습게도 (웃픈건가?)... 동전의 양면처럼 기억력이 나빠지는 것에도 장점은 있다. 매일매일 보는 일일 드라마를 비롯해 몇몇 예능 프로그램도 처음 보듯 새로워 재미가 있으시단다. 분명 어제, 혹은 며칠 전에 본 드라마/예능프로그램인데 오늘 또 재방송을 보고 계신 게 답답해서 (물론 나도 단지 재미가 있단 이유로, 놓친 장면 보려고 재시청하는 경우가 있으면서!) 물어보면, 아냐, 이건 안 본 거야, 그러신다. 하긴 드라마를 보면서 휴대폰도 들여다보고 나한테 이것저것 참견도 하고 딴 생각도 하노라면 당연히 놓친 장면이 많겠지. ㅠ.ㅠ

해서 벌써 한달이 지나 드디어 내일 다시 정신의학과 정기검진일이다. 뇌 영양제를 다른 걸로 바꿔달라고 하면 되려나? 그건 또 다시 후유증이 없을까, 아무래도 뇌 호르몬에 관여하는 약물일테니 조심스럽고 걱정이 많다. 평소 드시던 약끼리도 돌연 충돌을 일으켜 이상 증세를 경험한 적도 있는 분이라 더더욱. 

노화는 질병이 아니라 그냥 서서히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변화로 받아들여야한다고 하는데, 아무리 봐도 노화는 질병이고 장애 같다. 나부터도 기억력이 무너진 건 물론이고 아침마다 일어나면 손마디가 뻣뻣한 걸 어쩌라고. ㅠ.ㅠ 벌써 이런데 무려 100세시대라고? 그건 너무도 무시무시한 저주가 아닐까.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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