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 겨울을 앞둔 11월은 1년중에 내가 가장 넘기기 힘들어하는 달이어서, 괜한 우울감과 무기력에 시달리는데 올핸 그럴 겨를이 아예 없었다. 뭔가 대단히 분주한 일들이 많았고, 토요일이면 광화문으로 뛰쳐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나의 11월 우울증을 날려버린 공은 파렴치한 닭그네에게도 일부 지분이 있다. 수십년만에 국민대통합을 이룬 공이 그치에게 있듯이 말이다. 하여간 시국이 시국인지라 후다닥 일감 처리할 때 아니면 진득하게 컴퓨터 앞에 앉아 뭔가 끼적일 마음의 여유도 없었던 것 같다. 홧병으로 가슴이 콩닥거리면 머리가 텅 비거나 무거워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블로그형 인간성은 버릴 수가 없어서 짧은 여행기며 그날그날 단상들을 적어놓지 않고 계속 쌓이니 숙제 안한 찜찜한 기분이 가시질 않았다. 연말 베스트 집계 하려면 기록해둬야하는데! 뭐 이런 심정? ㅎㅎ 해서 간단하게 사진위주로 뭐 하고 지냈나 근황 정리 시작.
2014년 가을에 법주사(부모님의 신혼여행지였다)에 함께 다녀온 이후로, 엄마는 가을만 되면 모녀 여행을 바라신다. 작년엔 그래서 부산엘 다녀왔는데, 올해는 전주와 담양을 여행지로 정했다. 엄마가 전주 학인당에 묵어보고 싶어 하셨기 때문이다. 한번 경험해보고 싶다는 왕비마마의 로망은 실현했으되, 결과적으로 한옥 민박은 노년의 엄마에게 맞지 않는 걸로 결론이 났다. ㅠ.ㅠ 댓돌 위로 툇마루로, 높은 문지방 넘어 화장실로 오르락내리락해야하는 구조가 관절 부실한 노인에겐 부적절. 게다가 1년만에 왕비마마의 기력은 너무도 약해져, 좀체 걷질 못하셨다. 진짜 나이든 할머니구나 하는 걸 실감한 여행이어서 덩달아 나도 마음이 무거웠다. (넌 안 늙었겠냐!)
가을 학인당 마당에도 꽃이 있더라
학인당에서 하룻밤 자고 비교적 가까운 담양 소쇄원으로 향했다. 첫날은 정말 날씨가 화창했는데 담날은 우중충 비가 종종 뿌렸고, 상경길엔 억수로 비가 쏟아지더니 평택 즈음해서 날이 개며 무지개를 만났다. 운전하며 무지개를 본 건 난생처음이지 싶다. ㅎㅎ
뒷짐지고 소쇄원을 거니는 할머니 ㅠ.ㅠ
한달에 두번 등산다니는 것 말고도 여차저차해서 '서울둘레길'이란 걸 걷기 시작했다. 서울시 경계를 크게 한 바퀴, 산자락도 걷고 한강 둔치도 걷고 더러 도로를 따라 걷기도 하는건데, 묘미는 뭐니뭐니해도 '스탬프'를 찍는 것이다. 빨간 우체통처럼 생긴 코스 시작과 끝지점에서 스탬프 용지에 구간 완주 기념 스탬프를 스스로 찍어 앞뒤로 다 채우면 서울시에서 완주증을 준다는 것 같다. 완주증서를 받고 싶은 마음은 없는데 암튼 앞뒤로 꽉꽉 귀엽고 예쁜 스탬프를 채우고 싶은 욕망은 활활 불타오른다. 웬만하면 하루에 막 5, 6시간씩 국토대장정 하는 느낌으로 걸어서 현재 1, 3코스를 완주했다. 마감 때문에 빠진 2코스를 올해 안에 얼른 채워넣어야지.. 하고 있다. 당분간은 추워서 중간에 점심 먹기 어려우니 나머지 코스는 따뜻한 봄으로 미뤄두었다.
소중히 접어 간직하고 있는 스탬프용지 ^^
둘레길 3코스는 총 26.1km 9시간 거리인데 그 중 17.6km를 6시간 동안 걷고나서 기진맥진했으나 바로 다음날 또 천마산엘 오르며 스스로도 내 체력에 놀랐다. ㅎㅎ 왕비마마가 뭐 찾아먹을 게 있다고 그렇게 빨빨거리고 다니냐고 핀잔하실 만도 하다. 그러나 스트레스 탓인지 혈압은 전혀 관리가 안된다는 게 함정. ㅠ.ㅠ
째뜬 올 가을엔 정말 원없이 단풍구경을 하러다닌 것 같다. 동네 은행나무도 눈부시게 아름다웠는데 이젠 잎 다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았으니... 확실히 겨울이다.
그 사이 콜드플레이 내한공연 소식에 한껏 설렜으나, 현대카드에서 발급을 거절당해 1차 좌절하고(나보다 연봉이 4-5배나 되는 프리랜서 편집자 후배도 카드 발급 거절당했다고 해서 또 한번 분노했다. 프리랜서는 곧 백수였던 거다;;), 엄마이름으로 간신히 발급받은 카드는 사전 예매 당일 오후에나 도착해 2분만에 매진됐다는 기사만 확인했을 뿐이고.. 다음날 일반 예매도 역시나 예매 실패. 짜증이 하늘을 찔렀다. 콜드플레이 팬들이 한국에 그렇게나 많을 줄이야. 암표가 막 100만원씩에 나돈다는데 그걸 사서 갈 만큼 광팬은 아닌 게지... 가난하기도 하고. ㅠ.ㅠ 4월 15일에 난 술 마실테닷!!! 흥.
토요일마다 이번은 마지막이길, 이번은 마지막이길... 그런 마음으로 광화문에 나갔는데 나라 돌아가는 꼬라지에 버럭버럭 홧병이 솟다가도 막상 현장에 가면 뭔가 울컥거리는 심정이 들면서, 그래도 민초들을 믿어보자는 희망이 다시 일어나는 것 같다. 정치판엔 도저히 믿을 놈이 없으니 촛불로라도 압력을 자꾸 행사하는 수밖에... 에효.. 지치지만 그래도 우리가 먼저 떨어져나가면 안된다는 마음으로 촛불 하나 보태야지. 그러고 있다. 요번주 토요일엔 도저히 나갈 형편이 안되는데 흠... 부디 9일에 온국민이 바라는 대로 일단 결판이 나길!
매주마다 촛불을 자체 제작해나갔더니 실력이 일취월장하고 있다. 첫날은 무늬 있는 종이컵에 흰 스티커를 붙여 글씨를 썼더니만 촛불빛에 무늬가 다 비쳐서 망했고, 두번째부터는 무늬없는 카페 커피컵을 재활용하거나 민무늬 컵을 사서 글씨를 썼다. 위 사진은 지난 토요일에 출동하겠다는 동생네 가족을 위해 할아버지 제삿날 준비하다 말고 만들어준 거다. 오른쪽 사진은 11월 26일에 청와대 200미터 전방까지 행진이 허가된 날, 경복궁 옆으로 정말 코앞까지 진출했던 기념으로 찍어온 것. 엊그제는 감기기운으로 덜덜 떨려서, 416개의 횃불 따라 청운동까지 행진하다 죄송한 마음으로 조퇴했다.
어서 끌어내리고 이젠 주말에 좀 쉬고싶다. 다들 그런 마음이겠거니... 하지만 헌재 결정에 또 압박을 하려면 한 겨울에도 촛불 들고 있어야하는 건 아닌지 불안하다. 토요일 한영애의 노래 '조율' 가사처럼 정말로 초자연적인 존재가 있다면, 이제 그만 좀 염원을 들어주시지... (나는 무신론자라지만 절실히 진심으로 기도하는 사람들 많지 않냐고요!!) 근데 뭐 또 그런 존재가 없어도 모든 이들의 의지와 뜻으로 해내면 되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