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출장 얘기를 쓰고 보니 한 가지가 더 궁금해졌다.
내가 직장생활을 때려친 것이 또 10년도 넘다보니, 요즘은 어떠려는지...
바로 여직원의 신발 얘기다.
첫 직장을 제외하고 나머지 직장에선 괴롭게도 여직원은 반드시 유니폼을 입어야 했더랬다.
나는 교복도 고1부터 자율화된 세대였던 지라 단체복을 입는다는 데 유독 거부감이 많았기 때문에 완전 정장스럽고 얌전한 디자인의 유니폼을 정말 싫어했는데
일부 여직원들은 옷값이 적게 들어 좋다면서 유니폼을 지지하기도 했으니, 단체로 반항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나 역시 울며 겨자먹기로 유니폼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웃기는 건 "여직원이 사무실의 꽃"(이자 심부름꾼이자 하녀)이기 때문에 이사진들의 심사까지 거쳐서 단정한 유니폼을 골라 입히는데, 그런 옷차림에 다들 슬리퍼를 찍찍 끌고다닌다는 사실이었다. ㅡ.ㅡ;;
모든 여직원들은, 아니 남자 직원들도 거의 어김없이 출근과 동시에 슬리퍼로 갈아신었고 점심시간에도 슬리퍼 바람에 밥을 먹으러 가기도 했다.
미국 회사의 한국 지사가 내 첫직장이었기 때문인지
나는 사무실에서 슬리퍼를 신고 돌아다니는 것이 보기도 싫을 뿐더러, 격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직장을 옮기고 나서도 유일하게 슬리퍼를 사무실에 가져다놓지 않고 구두(그것도 하이힐을!)를 신고 뚜벅거리며 돌아다녔는데, 그것 때문에라도 일부 여직원들한테 괜히 튀려 한다고 미움을 받기도 했다.
그치만 슬리퍼를 신으면 누구나 발을 질질 끌면서 걷게 되지 않나?
곱디 고운(?) 유니폼을 떨쳐 입고 슬리퍼를 질질 끌고 다니는 모습이라니... 난 그게 너무도 싫고 어색했고, 스타킹을 신어서 슬리퍼가 미끌거리는 느낌도 싫었던 것 같다.
그러면 또 몇몇 여직원들은 여학생들처럼 스타킹이나 맨살 위에 하얀 양말을 곱게 접어 신고 그 위에 슬리퍼를 신었는데, 그건 더욱 가관으로 여겨졌다. (참 내 취향 까다롭다 ㅋㅋ)
특히 나는 수시로 중역실에 불려다녀야 했고 ㅜ.ㅡ 말단 주제에 직접 결재판 들고 다니는 경우도 많았는데 정신머리 없는 인간이 매번 신발까지 갈아신을 생각까지 하는 건 피하고 싶기도 했더랬다.
(남녀직원 할 것 없이 슬리퍼를 신더라도, 당시 중역실에 결제받으러 갈 땐 다들 양복 윗저고리까지 갖춰입고 구두를 도로 신어야 하는 보수적인 분위기 탓도 있었을듯;;)
그런데;;
뉴욕에 몇번 출장을 다니면서 본 풍경은 여기와 정 반대였다.
(아.. 생각해보니, 영국 거래처에 출장갔을 때도 중년의 여직원 아줌마들 역시 배만한 구두를 신고 있었다!)
출퇴근 시간이면 멋지게 차려입고 커다란 숄더백을 들고 맨해튼 거리를 걸어가는 여자들을 참 많이 보는데(교통체증 탓이기도 하지만 그들은 15-20블록쯤은 우습게 걸어다니는 것 같다.) 그땐 다들 단화나 심지어 운동화를 신었다가 사무실 건물에 들어가기 직전에 커다란 가방에서 꺼낸 구두로 갈아신었다.
오래 걷기에 신발이 불편해서 그런 거라고 할 때, 나 같으면 사무실에 가서 편히 갈아신을 것도 같은데, 그들은 반드시 건물 로비에 들어가기 전에 심지어 한 블록쯤 전에 갈아신기도 했다.
궁금해서 동료 직원에게 왜 그런지 물었더니, 옷에 어울리지 않는 편한 신발 차림으로 회사에 출근하면 '프로페셔널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란다.
더욱이 본사의 경우 패션을 다루는 회사여서, 패션을 하는 사람이 패션감각에 뒤지면 곧장 도태되는 분위기고 (정말로 무슨 사고 터지면 다음날 몇 사람 짐싸서 내보내기도 했다) 사무실에선 원래 커리어우먼 같은 분위기를 당당히 풍겨야 한다고 했다.
그러니 본사 직원들 가운데 사무실에서 슬리퍼를 신고 있는 사람은 미국인 한국인 통틀어 딱 한 사람뿐이었다. 유일하게 슬리퍼 문화를 고수하는 사람은 바로 "늙다리 한국인 부사장"이었는데, 그걸 놓고 다들 몹시 혐오스럽다고 생각하며 나한테 그 이유를 묻기도 했었다.
당시 본사엔 사무실과 쇼룸이 여러 층에 나뉘어 있어서 그 건물을 참으로 많이도 오르락내리락했지만, 정말로 관찰해보니 다른 회사에도 적어도 정장 차림에는 편한 슬리퍼나 운동화 같은 걸 신은 여직원은 단 한번도 볼 수가 없었다.
물론 당시에도 자유분방한 의상 디자이너들은 종잡을 수 없는 패션을 추구하긴 했지만;; ^^
암튼 그들은 걷기 편하고 값싼 신발을 신고 거리를 걷다가 사무실에 출근을 하면 값이 조금 더 나가는 정장용 구두로 갈아신는데, 우리는 정 반대로 뾰족하고 예쁜 구두를 신었다가도 사무실에만 들어오면 편리한 슬리퍼 패션으로 바뀌는 셈이었다.
나는 워낙 옛날 일이라 그런가보다고도 생각했는데,
얼마 전 번역해 출간된 2006년 책에 나오는 '평범한' 뉴욕 여직원의 풍경도 10여년 전과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그녀는 뾰족한 구두에 발을 혹사시키지도 않으면서 값비싼 정장 구두가 망가지는 걸 방지하느라, 세일할 때 10불쯤 주고 산 단화를 매일 커다란 가방에 넣고 다니며 갈아신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섹스 앤 더 시티' 덕분에 명품을 휘두르고 다니는 뉴욕 여자들이 거리에서 눈에 더 많이 뜨이는 건 사실이지만, 지금도 모든 뉴욕여자들이 값비싸고 높은 구두를 신고 거침없이 뛰어다니는'캐리'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ㅋㅋ)
물론 요즘엔 슬리퍼형의 외출용 구두들이 다양하게 나왔으니
휴식용 슬리퍼인지, 멋내기용 슬리퍼인지 구분이 어려울 것 같긴 하지만
요즘 사무실에서도 출근을 하면 다들 편한 슬리퍼로 갈아 신을까?
내 경우는 너무도 멋지고 나를 무던히도 밀어주셔서 흠모했던 부장님이, 출근후 자리에 앉자마자 구두를 벗고 두 다리를 폴짝 들어올려 슬리퍼로 안착하는 모습을 본 순간 정이 다 뚝 떨어졌더랬는데... ㅠ.ㅠ
편한 게 제일이라지만, 암튼 나는 사무실에서 슬리퍼를 찍찍 끌고 다니는 문화가 영 마음에 안들고, 유니폼이든 양복이든 사무실 차림엔 슬리퍼가 절대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너무 유별난 걸까? 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