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

추억주머니 2007. 4. 20. 20:41
얼마 전까지도 나는 만년필을 쓰는 사람이 더는 없는 줄 알았다.
극히 일부의 마니아들만 고가의 만년필을 소장하고 사용하고 그러는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예전에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처음 아버지한테 선물 받은 것이 만년필과 시계였듯, 요즘도 만년필이 꽤 훌륭한 입학이나 입사 선물이라고 했다.
그것도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수십만원을 호가하는 '금장식' 만년필 같은 것이...-_-;;;
((음.. 부자에 대한 괜한 비호감과 적대감이 있는 못난 이 성격하고는;; ))
그런데 또 주변에 물어보니, 꼬박꼬박 다이어리를 쓰고 수첩을 정리하는 지인들 가운데는
만년필을 쓰고 있는 이들이 더러 있기도 했다.
((아.. 부끄러운 나의 편견과 근시안;; ))

아무려나, 과거의 나는 만년필로 쓰는 글씨를 참 좋아했다.
아버지한테 선물 받은 만년필에 잉크를 채워넣고(카트리지형은 나중에나 보급됐다!)
가끔 잉크가 쏟아져 손이나 공책을 버리기도 하면서, 사각사각 써지는 글씨의 촉감이 어찌나 좋은지, 편지를 쓰거나 중요한 걸 적을 땐(좋아하는 선생님 과목의 필기라든지;;)  꼭 만년필을 집어들었고, 길이 아주 잘 들은 파카 45와 21 만년필 두개는
오래도록 나의 사랑을 받았다.
중학교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영어를 배우고, '펜맨십'이라는 영어 공책에다
심지어 펜촉에 잉크를 찍어가며 인쇄체, 필기체 대소문자를 연습했던 까마득한 옛날이었던
지라, 만년필은 더더욱 소중한 애장품일 수밖에 없었는데
오래된 연필꽂이에 분명히 들어 있다고 생각했던 만년필은 카트리지형으로 개조를 한 뒤로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마도 내가 손으로 뭔가를 끼적이고 (하다못해 다이어리라도) 기록하는 걸 그만두게
되면서 만년필에 대한 애착도 덩달아 사라져 신경도 쓰지 않게 된 듯하고,
그와 더불어 명필은 아니라도 "연애편지는 꽤 썼겠군"하는 평가를 받았던 동글동글 깔끔한 글씨체도 흐트러져 이젠 간혹 계약서를 써야 할 때에도 내 글씨가 부끄러울 정도로 악필로 변하고 말았다.

그러던 중 올케가 만년필을 하나 선물했다.
번역계약 같은 거 하러 가서 근사하게 만년필로 꺼내서 서명하는 모습이 멋져보일 거라면서^^ (역시 폼생폼사에 또 내가 좀 약하다)
문제는 파는 데가 흔하지 않은 제품이라 잉크 카트리지를 사기까지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것(물론 나의 귀차니즘이 가장 큰 이유지만;;)인데,
오늘 내가 만년필 관련 포스팅을 하는 걸로 보아 벌써 다들 눈치 챘겠지만
드디어 "맞는" 잉크 카트리지를 장만했다!

두어달 전에 잠실 롯데까지 부러 찾아가서 사온 카트리지는 기막히게도 맞지 않는 것이었다. ㅠ.ㅠ
오래 안 써서 일단 따뜻한 물에 펜촉을 다 헹궈낸 다음에 쓰라기에 무턱대고 집에 가져왔다가
시도해보고는, 내가 바보처럼 못 끼우는 건줄 알았더니만 파는 놈이 잘 못 내준 것이었더군.

암튼... 오늘 철철 비맞고 시내 나간 김에
몇달 째 들고만 다니던 만년필을 반드시 써보겠다는 욕심으로 카트리지 장만에 성공을 거둔 것.

집에 와서 종이에 자꾸 낙서를 해보고 있는데...
꽤 굵게 사각사각 적히는 필기감이 아주 그만이다. (이상하게 나는 볼펜도 굵은 게 좋다. 아무래도 날아가게 갈겨쓰는 글씨에 좀 더 품위를 실어주기 때문인듯...)
졸필도 약간은 근사해보일 만큼 ^^;;

만년필로 간만에 어디론가 편지라도 써야할 것 같은데;; 그럴 자신은 없고
하다못해 수첩에 메모라도 해야겠다.

블로그에 주절주절 끼적이는 것도 나름 행복하지만
가끔 이렇게 아날로그 감수성을 자극하는 물건들이 주는 행복감이 참 푸근하다.
나는 어쩔수 없이 아날로그 세대인듯. ㅎㅎ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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