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 깎기

투덜일기 2014. 1. 13. 21:33

새해들어 사흘에 한번은 연필을 깎아대야 했다. 연필 다섯자루로 시작했다가 현재는 아홉자루로 늘어났는데, 그나마도 중간에 몽당연필 두 개는 버렸다. 새해들어 1월 1일부터 금강경 한문 필사를 시작한 대비마마 덕분이다. 처음엔 소형 연필깎이로 돌려댔으나, 몇년째 멀쩡히 잘 깎이던 칼날이 잦은 혹사에 문제가 생겼는지 자꾸 심이 부러지기 시작했다. 연필깎다가 심이 부러지면 왜 그리도 짜증이 나는지...  암튼 자주 깎아드리기 귀찮아서 연필 갯수를 늘려 바쳤는데도 사흘쯤 지나면 컴퓨터 책상에 뭉툭해진 연필이 놓여있다. 처음엔 '좀 깎아줘'라고 적힌 엄마의 쪽지도 연필과 함께 놓여 있었다. 나 잠든 새 외출하시면서 놓고 간 거라나. ^^;

 

대비마마는 아주 오래전에도  금강경 한문 필사를 하신 적이 있는데 그 땐 서예를 배우러 다닐 때라 무려 한지에 붓글씨로 필사를 했었다. 그나마 요번엔 필사용 책을 사서 흐리게 적혀있는 글씨를 선따라 베껴적기만 하는 거라 엄청 수월하다지만, 오늘 드디어 한번 필사가 끝났다는 걸 보면 3번 꼬박 베껴 적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것 같다. 연필로 꾹꾹 눌러 작게 한자를 쓰려면 손가락은 또 얼마나 아플까나. 암튼 매일아침 기상과 동시에 1시간씩 금강경 필사에 여념이 없는 대비마마를 보면 존경심이 일 정도다. 우리 가족 중에서 아마도 요새 제일 성실하고 건강하게 살고 계신듯!

 

새해들어 운동을 좀 해보겠다던 나의 다짐은 작심삼일도 못되고 딱 두번 나가고 끝이었건만... 하루도 안빠뜨리고 새벽마다 상을 펼쳐놓고 필사를 하다니, 그 저력은 단순히 개인의 의지력일까 강인한 모성일까 종교의 힘일까?  필사용 책인지 공책인지 앞에 적어놓은 기도 발원문을 슬쩍 들춰보아도 노친네의 마음이 느껴져 가슴이 찡하다. 까마득한 옛날 동생들의 입시를 앞두고도 대비마마는 새벽마다 집에서 108배를 했었다. 남들은 100일 내내 절간으로 교회로 새벽기도도 다닌다는데! 그러시면서. 물론 재수, 삼수를 거친 동생녀석들의 입시 결과로 볼 땐 하나도 효험이 없는 생고생이었지만, ^^ 새벽마다 쿵 쿵 무릎을 찧으며 절을 하는 엄마의 마음을 동생들이 설마 모르진 않았을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신은 없다고 느끼지만, 그래서 대비마마의 금강경 필사와 정성스런 기도 발원이 초현실적인 결과를 만들어낼 리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온 가족의 건강과 사랑과 손주들의 행복을 조목조목 적어 비는 노친네의 소원이 이왕이면 이뤄지길 바라고 그렇다면 난 열심히 연필이나 깎아드려야 도리일듯. 그러나 난 벌써 연필깎는 게 귀찮아서 몇번이나 짜증을 부렸고(볼펜으로 쓰시지, 아 왜 연필로!?) 대비마마의 자립을 위해 튼실한 자동 연필깎이를 사놓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까칠한 딸이다. ㅋㅋ 헌데 나는 워낙 잘 하고 있어서(?!) 발원문을 따로 안 썼다고 하시더니만 오늘 보니 나를 위한 기도도 맨 아랫줄에 연필로 덧 적어넣은 걸 발견했고, 좀 찔려하는 중이다. 자동 연필깎이를 사? 말어? ㅋㅋㅋ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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