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사중 불이 나질 않나, 종친부 담장 문제로 전주이씨와 싸워대질 않나, 계속 말도 많고 탓도 많았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드디어 개관을 했다. 11월 개관 직후엔 사람들이 엄청 몰렸대고 인터넷 예약이 아니면 들어가지도 못한다고 해서 (내가 바쁘기도 했고) 12월 들어 별렀다가 가봤다. 경복궁 옆 길가에서 보면 옛날 학교 건물 같기도 하고 오래 된 창고 건물 같기도 해서 볼품없다는 느낌을 종종 받았는데(있던 건물 그대로 쓰려니 어쩔 수 없었겠으나;;;) 안에 들어가보고선 일단 건물이 맘에 들었다. 사방으로 툭툭 트여 시선 가리는 거 없고, 지하층인데도 통창이 있어서 환하고, 유리창 밖으로 너른 마당 보이는 거 좋아! (그런 의미에서 종친부 담장은 원래 계획대로 안 세웠으면 좋겠다는 것이 나의 의견. 그러나 뭐 일부만이라도 세우기로 했다지 아마?)

 

건물이나 공간은 그런대로 흡족했던 반면 특별 기획전시는 한 마디로 기대에 좀 못미쳤다. -_-; 내 기대가 너무 컸던 걸까? 물론 가장 기대가 컸던 서도호의 <집속의 집속의 집속의 집속의 집>은  좋았고, 그래서 통합관람권 7천원이 하나도 안아깝다고 여겼지만, 개막 특별전이면 앞으로도 계속 상설전시할 작품들도 엄청 유명한 대작들을 좀 턱턱 가져다 놨어야하는 게 아닐까나? 전시실이 꽤 많다고는 하지만 1층과 지하 전시실 돌다보니 다리만 아프고 금세 끝나는 느낌이 들었다. 2층엔 굳이 미술관 공사과정 장면들과 공사소음까지 재현해놓은 공간을 마련해놓았던데, 발상 자체는 기발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나 같은 사람은 싫다규~ ㅋㅋ

 

특별전시를 다 포함한 통합관람권은 7천원. 각각의 전시를 3천원, 5천원으로 볼 수도 있게 해놓아, 전시실 입구마다 표를 보여달라고 하는 게 좀 성가셨다. 가방과 소지품은 디지털도어락 달린 무료 사물함에 넣어두고 다녀서 홀가분했지만, 핸드폰이랑 티켓 주머니에 넣었다 뺐다 하다가 결국 일행 하나는 전시장 바닥에 표를 떨어뜨리기도 했다. 통합권은 팔찌 같은 걸로 대체해야 하지 않을까, 직원에게 툴툴거렸더니 그렇게 건의 해달라고...  티켓 떨어뜨리는 일이 비일비재한가보다.

 

1층에 아마도 제일 큰 제1전시실이 있고 거기에 <자이트가이스트-시대정신>이라는 전시가 마련되어 있다. 반짝반짝 빛나는 거대한 도마뱀 조형물이 인상적이었고, 미래의 로봇이었던가... 새하얀 여체의 기계식 몸매가 멋졌던 이불 작가의 조각도 좋았다. 전시실 맨 안쪽 구석에 노숙자(?)를 형상화해놓은 작품도 재미있었던 것 같다. 귀찮아서 이날은 도슨트 설명을 안듣고 그냥 내키는 대로 돌아다닌 탓도 있지만, 대체 뭐가 <시대정신>이라는 건지 주제가 딱히 와닿지는 않았다. 조선총독부 건물이며 숭례문을 소재로 삼은 작품들도 그렇고, 뭔가 중구난방이란 느낌... 이 시대가 워낙 개판이란 의미인가? ㅋㅋ 

 

설치미술 말고는 죄다 작품 사진을 못찍게 해서 별로 사진도 없다. 남들은 몰래몰래 다 찍는다면서 일행 하나도 어느틈에 몇 개 찍어오긴 했던데, 뭐 굳이 찍지 말라는데 싫은 소리 들을까봐 조마조마하면서 도촬까지 할 마음이 드는 작품은 없었던 것 같다. ;-p 뭐니뭐니 해도 내가 기대했던 서도호 작품은 맘껏 사진 찍어도 되는 거니까 ㅎㅎㅎ

 

 

작품 내부에서 찍은 사진 작품 전체 외형은 위층에서 내려다보아야 다 보임

서도호의 작품은 지하1층 중앙에 '서울 박스'라고 하는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리움 미술관 전시 때도 본 적 있는 미국 유학시절의 3층짜리 서양집 안에 다시 성북동의 한옥집이 들어앉아 있는 모양새다. 둘 다 실물 크기라는 것 같다. 제목이 왜 <집속의 집속의 집속의 집속의 집>이냐면, '한옥을 품은 양옥, 양옥을 품은 서울 박스, 서울박스를 품은 서울관, 서울관을 품은 서울'까지 공간이 확장되는 개념을 담은 거라서 그렇다고...  상설전시가 아니라서 5월 11일까지만 볼 수 있단다. 끝나기 전에 한번 더 가서 봐줘야지, 라고 마음 먹었다.

 

서도호의 작품을 한바퀴 돌아나오려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청아한 가곡이 들려왔다. 어머나, 여긴 전시장에 음악도 트나보다 생각했더니 그게 아니었고 <리밍웨이>라고 하는 대만 작가의 <소닉 블로섬>이라는 작품이었다. 병환 중인 어머니에게 슈베르트의 가곡을 틀어드리면서 느꼈던 교감을 작품으로 승화시켜 관객들과도 느낌을 교류하려했다는 것 같다.

 

리밍웨이, 소닉 블로섬, 가운데 서 있는 분이 성악가

전시장 통로 같은 곳에 의자 하나와 나무 틀 같은 게 덩그라니 놓여있는데, 시간대 별로 진한자주색 가운을 입은 성악가가 나타나 직접 선택한 관객 한 사람을 의자에 앉히고 혼자만을 위한 노래를 들려준다. 남녀 성악가 네 사람이 돌아가면서 노래를 하는 듯...

슈베르트의 가곡이 그렇게 아름다운 줄 이날 처음 알았다. 뭔가 괜히 울컥 하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작가의 어머니가 아팠을 때 들려드렸다는 글귀를 보았기 때문만은 아닌듯...),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스피커로 흘러나온 아리아를 들은 죄수들이 잠시 느꼈을 자유의 희열이 뭔지 알 것 같다는 느낌도 들고... 암튼 천장 높은 전시장을 쩌렁쩌렁 울리는 저 성악가의 목소리가(앳된 얼굴로 보아 어쩐지 성악전공 학생 같다고 짐작했음) 참으로 좋아서, 다른 전시 보다가 노래소리 들리면 다시 달려가 옆에 서서 구경하곤 했다. 그치만 만약에 성악가가 나를 콕 집어 저 의자에 앉히겠다고 하면, 아마 난 얼굴 뜨겁고 민망해서 처음부터 거절하거나 제대로 음악을 감상할 수도 없을 것 같다. ^^;

암튼... 서울대 동문회 하냐는 뒷말을 들었다는 1, 2관 전시에서 시큰둥하고 애걔걔 싶었던 마음이 서도호 작품과 슈베르트 가곡 작품 딱 두 개로 무마되는 기분이었다. 

 

리밍웨이는 이 <소닉 블로섬>(굳이 번역하자면, 소리 꽃, 음향 꽃라는 뜻인데, 또 다른 작품과의 연계성도 있고 하니 번역해서 제목을 달아주지 그랬나 싶었다. '블로섬' 정도는 누구나 아는 영어인가? -_-;;) 보다도 <움직이는 정원>이란 작품으로 더 언론이나 블로그계의 조명을 받은 것 같다. 별것도 없는 길다랗고 시커먼 콘크리트 틈새 같은 데 진짜 꽃을 꽂아놓고 관객들이 집어가게 해놓았기 때문이다. 요는 그렇게 집어간 꽃을 본인이 갖는 게 아니라 '낯선 사람'에게 주면서 또 다시 교류와 소통을 하라는 거란다. 그런 경험을 sns 같은데다 남기는 게 조건이라던가.. (작품 설명 자세히 안 봤음 ㅋㅋ)

 

암튼 수시로 수백 송이씩 꽃을 꽃아놓아도 워낙 관객들이 많으니, 꽃들고 다니는 사람들은 더러 봤어도 작품에 꽃이 꽂혀있는 장면은 한번도 보질 못했는데 부지런한 일행이 어느 틈엔가 한 송이 뽑아와 내게 바쳤다. ^^; 낯선 사람 아니면 뭐 어때.. 이러면서. ㅋㅋ

사실 남들 들고 다닐 땐 거베라 조화인가보다 했는데, 실제로 받고 보니 철사로 줄기를 튼튼하게 버텨놓은 생화였다. 줄기가 엄청 길어서 오래 들고다녔더니 자꾸 부러져 줄기는 점점 짧아지고, 부러진 줄기는 버릴 데도 없어서 주머니에 넣어가지고 다니자니.... 어느 순간 꽃이 짐스러워지는 게 아닌가.

그래서 이 사진을 기념으로 남기고는 주변 인물을 물색하다, 어쩐지 예뻐보이는 커플을 골라 아가씨한테 불쑥 건네주었다. 엄청 좋아하며 고맙다는 아가씨에게, 속으로 약간 미안하긴 했지만 뭐 작가가 원하는 게 바로 그런 교류가 아니겠냐며 돌아섰다.

 

 

 

 

고대 화석 같기도 하고, 심해 생물체 같기도 한 이 작품은 최우람 작가의 <오페르투스 루눌라 움브라> ^^;

중앙홀 천장에 매달려 있는데 저 갈비뼈 같은 돌기들이 아주 유연하게 움직이며 그림자도 달라져서 신기해하며 한참을 구경했다. 첨단 과학기계문명과 고고학적인 상상력의 만남이라나 뭐라나.. 그랬던 것 같다. 이 작품은 그래도 내년 11월까지 전시 예정.

 

 

 

 

 

 

 

'타시타 딘'이라는 작가의 작품인데 제목도 안 적어와서 까먹어 모르겠다. 7명의 큐레이터가 7명의 작가를 선정했다던가 하던 <연결-전개> 전시 중 하나였는데, 깜깜한 전시실 저 끝에서 영상물이 계속 돌아가고 바닥에 길쭉한 방석 같은 걸 놓아 앉아 쉴 수 있게 해놓은 게 좋아서 꽤 오래 다리를 쉬었다. 그래서 일부러 내 발도 같이 찍었음. ㅋㅋ  

 

 

그밖에 <알레프 프로젝트>라고 해서 도무지 나로선 이해할 수 없는 신개념이론의 현대미술 작품들이 있었는데 전기고문이 바로 이런 거겠구나 싶게 계속 스파크가 터지는 깜깜한 방도 있고(나는 그 안에서 5분도 못 버티겠다 싶어서 그 전시실 담당 직원이 불쌍할 정도였다), 이상한 액체를 담아 특수섬유로 만들어 사람이 다가가면 촉수처럼 막 움직이는 거대한 샹들리에 같은 작품도 있었다.

 

새빨간 고딕체 글씨로 우리 사회의 문제를 지적하는 듯한 장영혜중공업 프로젝트도 나로선 난해했고....

어우.. 난 역시 현대미술은 어려워서 잘 못보겠어, 라는 좌절감을 안겨주는 작품들이 꽤 많았던 것 같다. ^^;

 

 

 

 

암튼 그래서 빙글빙글 전시실을 한바퀴 다 돌고 나선 체력 완전 방전. 씩씩한 일행들이 더 돌아다니는 동안 나는 자꾸만 앉아 쉴 곳을 찾고 있었다. 전시장 안에 벤치를 마련해놓은 곳도 있는 건 반가웠지만, 서울박스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자리잡은 전시장 사이사이마다 쉴 곳이 있진 않았음. 날씨가 춥기도 했지만 그나마 지하 공간 안마당은 뭔가 공사중이라 출입금지.

 

그래도 날씨 따뜻해지면 나가서 쉴 수 있을 것 같아 사진 한방 박아왔음. 오른쪽은 어느 구석에 있던 아주 푹신한 소파. 전시장을 죄다 돌고 났을 즈음엔 다리허리가 너무 아파서 저 공간이 제일 마음에 든다며 오래도록 처박혀 일행을 기다렸다. ㅎㅎ

 

이날 가장 큰 불만사항은 카페테리아가 로비 밖에 있다는 것! 전시장은 입구와 출구도 달라 재입장이 안되기 때문에, 전시 보다가 카페인을 충전하고 다시 관람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게 아닌가! 아 젠장. 3시간 가까이 가열차게 전시를 구경한 나는 어차피 볼 만큼 봤으니 퇴장을 선언했으나, 뒤늦게 합류한 일행 하나가 전시를 절반도 못본 상황이라 여차하면 싸울 태세였는데 ^^; 직원이 융통성을 발휘하여 그럼 다녀오시라고 허락해주었다. 앞으로도 전시 보다가 카페 들락거리는 문제는 좀 개선이 되어야할 듯.

 

암튼 아직 초창기라 도서관도 디지털아카이브도 개장을 안했다는 것 같다. 따뜻한 봄쯤 되면 죄다 이용할 수 있으려나. 그런 기대를 안고 나왔음.

 

정명우, [움직이는 바닥에게] 2013/12/6

인사동으로 이동하려고 마당을 뒤쪽으로 가로지르려니 마침 아트선재 앞에선 행위예술이 준비중. 트럭에 온갖 기계와 장비를 올려놓고 퍼포먼스를 벌이는 <움직이는 바닥에게>란 작품. 춤도 출 거라면서, 시간 되면 구경하고 가라기에 서서 좀 구경했는데 ㅋㅋㅋ 춤이 아니라 수줍은 율동 수준. ^^; 마지막까지 참 현대 예술은 어렵구나야....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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