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준비로 명절 며칠 전부터 꽉꽉 채워놓았던 냉장고 두대가 드디어 거의 다 비었다. 그간 남은 명절음식으로 꽤나 편하게 먹고 지냈는데, 어젠 드디어 먹을 게 없어서 새로이 된장찌개를 끓여야 했다. 빨랑 장을 봐다가 뭐라도 밑반찬을 만들어놓지 않으면 끼니 때마다 까칠녀의 짜증이 폭발할 위험이 있다. 하늘은 왜 내게 오만가지 식탐만 내리고, 김치나 반찬 한 개만 놓고도 맛있게 밥을 먹을 수 있는 착한 식성은 주지 않았는지.... 젠장. 거기다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을 세트로 껴안고 계신 대비마마까지. (왕비마마에서 대비마마로 호칭을 바꿔볼 요량이다. 그럼 내 신분도 올라갈 수 있을지도 ㅋ)
그나마 냉동실에 얼려두고 쓰던 표고버섯이며 닭고기도 동났고, 굴비도 추석때 끝을 보았다. 주기적으로 텅텅 비는 냉동실과 냉장고를 보면서 스스로 꽤나 알뜰하게 살림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사실이다. 냉동실에 정체모를 검정비닐과 하얀비닐 덩어리가 그득하게 들어있는 거, 난 너무 싫다. 그렇다고 냉장고 CF에 나오는 것처럼 훌륭히 정리된 건 아니지만, 째뜬 평소에 냉동실은 절반 이상 비어있어야 뿌듯하다. 그래야 냉커피 탈 때 얼음에서 이상한 냄새도 안나고 말이지...
어제부턴 냉장고와 냉동실을 아무리 열었다 닫았다 해도 딱히 뭘 해먹을 게 없어서 항상 면식을 추구하는 점심 끼니도 이틀 내리 소면을 삶아 나박김치에 말아먹었다. 파스타도 알리올리오는 가능하겠지만, 같이 먹을 채소거리가 없어서 안되겠다. ㅠ.ㅠ 4분의 1쯤 남은 무토막과 당근 자투리만 나뒹구는 냉장고를 보며 이상스레 먹고싶은 건 많은데, 장보러 나가긴 싫으니 참;;
째뜬 명절 노동의 강도로 깡그리 사라져버린 요리 본능과 의욕을 되살려보고자 그간 찍어놓은 음식 사진을 찾았는데, 생각보다 별로 없다. 아마 요리할 땐 주로 심술을 부리고 있어서 사진찍고 어쩌고 할 마음이 안들기 때문이리라. 요리에 병원놀이까지, 현대판 장금이가 따로없다고 자화자찬에 킥킥거리면서도 막상 현실에선 표독스런 히스테리를 부리고 있으니... 헛헛.
어쨌거나 날도 더운데 이리도 잘 해먹고 살았구나.
정성이 뻗쳐도 유분수지. 쌀독에 섞어놓은 잡곡 말고, 새하얀 밥으로 제대로 싼 김밥이 먹고싶어서 1kg짜리 쌀 한봉지를 따로 사다가 해먹은 날이다. 김발을 써도 내가 김밥을 말면 꼭 내용물이 한쪽으로 쏠리는데, 이날은 워낙 심혈을 기울였던지 중앙에 얌전히 들어가 박힌 김밥도 있어서 칼질하며 스스로 감동해 찍어놓은 사진이다.
그치만 맛은 뭐 그저그랬다. 저염식으로 살다보니 대체로 간이 싱거운데, 김밥은 싱거우면 맛이 없다는 슬픈 사실.
이름하여 <구운 채소 샐러드>
새송이, 파프리카, 브로콜리 모두 프라이팬에 그냥 구워가지고(기름 없이!) 견과류 좀 얹은 다음 프렌치 드레싱 끼얹으면 끝. 각종 채소를 오븐에 굽는 거라지만 , 오븐 없으니 어쩌겠나 프라이팬에 그냥 구워서 해결.
원래는 '구운 가지'가 포인트인데, 이날은 냉장고에 가지가 없었다.
가지와 버섯은 어떤 조리법을 써도 맛있는 재료. 들기름에 그냥 살짝 볶기만 해도 훌륭. 그래서 난 냉장고에 각종 버섯이 떨어지면 불안하다.
<크림소스 치킨 스파게티>
특이하게 이 크림소스는 콩국물로 만든 거다.
마트에서 파는 콩국물 사다 콩국수 해먹고 콩국 양이 애매하게 남았길래 파스타에 응용했는데, 꽤나 맛있었다. 하얗게 끓인 비지찌개나 콩탕에 밥 비벼 먹는 느낌도 좀 나고... ㅋ
저민 마늘과 양파와 버섯은 내가 만드는 모든 파스타에 기본으로 들어간다. ㅎㅎ
<크림소스 버섯 페투치네> ㅋㅋㅋ 과정샷부터 완성품까지 사진을 다 찍은 날도 있다.
버섯도 양송이, 새송이, 표고 버섯 다 들어갔음. 브로콜리는 애교로 투척.
연희동 제니스카페에 가서 파스타 먹은 날, 페투치네 면과 스파게티 면을 팔길래 냉큼 사와서 이렇게 잘 해먹었다.
이건 그냥 우유에다 밀가루 좀 풀어서 만든 크림소스.
스파게티에 관한 한, 대비마마께서는 굳이 밖에 나가서 비싼 돈 주고 사먹을 필요가 없다고, 내가 만든 파스타가 더 맛있다고 평하시었다. ^^v
일단 재료가 엄청 풍성하니깐 뭐;; (2인분 파스타에 들어간 버섯 양을 보라! ㅎㅎㅎ)
모짜렐라 치즈까지 솔솔 얹으면 비주얼도 완벽! ;-p
이번엔 <토마토소스 버섯 페투치네>
사실은 토마토소스와 크림소스가 섞인 핑크소스다. 당연히 내가 만들었을 리는 없고 ^^; 마트에서 파는 핑크소스 사다가 활용했는데 간이 좀 강해서 그렇지 맛은 제법 훌륭하다. 토마토 페이스트도 어차피 사와야 하는 거니깐 뭐;;;
꼬라지는 좀 우습지만 이래뵈도 이름은
<두부 잡채>
부침용을 사왔는데도 두부를 길게 채 썰어 부치는 게 꽤나 어려웠다. 언젠가 한정식집에서 먹어본 걸 활용한 것.
단백질 반찬이 하나도 없는 날 묘안이라며 만들어보았으나, 달걀 지단도 그렇고 두부 채썰어 부치기도 상당히 귀찮아서 다시는 시도하지 않았다.
간장 양념에 잰 표고버섯과 호박, 양파를 볶을 때 간을 좀 세게 해서 그냥 버무려 먹었는데 비주얼은 좀 빠져도(당근 먹기 싫어서 안넣었다! ㅋ) 슴슴하니 맛은 괜찮은 편. 엄마가 매운 걸 못드셔서 그렇지, 채소 볶을 때 매운 고추를 좀 썰어넣으면 칼칼한 맛도 낼 수 있겠다고 생각.
으음... 사진을 보며 새삼 느낀 건... 음식도 음식이지만 요리본능을 훨훨 불태우려면 예쁜 그릇을 사야겠다는 엉뚱한 결론을 내렸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