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소나타

놀잇감 2012. 4. 29. 19:52

 

점심을 배불리 먹고 곧장 들어간 탓도 있겠으나, 워낙 잔잔한 영화라 감기는 눈꺼풀을 애써 들어올리며 하품과 함께 어렵사리 봤다. 가을에 봤더라면 좀 더 확 와 닿는 느낌이 있었으려나? 어쨌든 꼭 보라고 주변에 추천할 만한 매력을 느끼지 못했음에도, 며칠 지나서까지 불현듯 생각나는 장면이 있는 영화다.

 

(스포일러 주의)

 

모녀의 이야기라서 그랬을까? 잘나고 이기적인 유명 피아니스트 엄마에게 치인 상처를 간직하고 있는 평범하고 소심한(사실 그렇게 평범하지도 않다. 자기 책을 두권이나 낸 작가던데) 딸과 모성에 익숙치 않았던 엄마의 갈등을 담은 영화다. 포스터 카피엔 '화해의 이중주'라고 되어 있지만, 두 사람이 화해했다고 과연 볼 수 있을지.

 

엄마는 폭풍같은 딸의 비난을 듣고나서 그저 몰랐다는 말만 되풀이하다 결국 다시 도망친다. 모성애가 여성이라면 누구나 타고나는 천부적 소양이 절대 아니며, 아무나 잘 할 수 있는 역할도 아니라는 주장에 백번 동의하는데도, 나는 딸 에바(리브 울만)의 입장에 더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위대한 예술가라면야 개인의로서의 삶보다는 예술과 일을 앞세워 예민하게 사느라 주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걸 용납하는 시선도 있겠으나, 나는 그런 선택을 결코 정당화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 같으면 그렇게 오래 참지도 않았을텐데, 에바는 엄마에게 늘 버림만 받은 상처 때문에 아무에게도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굳게 믿으며 평생을 살았으면서도 여전히 엄마를 더 보살피고 걱정하는 쪽이다. 답답해서 내가 미쳐! 엄마인 살롯(잉그리드 버그만)도 딸에게 반문한다. 그렇게 오래 날 미워했으면서 그동안 왜 아무 말도 안했느냐고. 내 말이... (하지만 다가가 말을 걸기조차 불가능할 만큼 엄마가 냉정하게 곁을 안줬을 수도 있다!)

 

1978년 작품이고 워낙 고전적인 베리만의 영화라서 한 편의 연극을 보는 것도 같다. 첫 장면은 에바의 남편이 관객을 향해 아내 이야기를 하며 시작되고, 독백, 방백도 많이 활용한다. 홍상수 영화에서도 많이 보듯, 카메라가 인물을 갑자기 확 끌어당겨 클로즈업하는 장면도 종종 연출되고, 배경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다. 그런데도 촌스럽다는 느낌이 크게 안드는 건 거장의 힘? 아니면 내 편견의 힘? ^^;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베리만의 영화 중 걸작을 뽑아 계속 상영할 모양이던데, 다른 것도 보러가게 될 것 같지는 않다. 십자군 전쟁을 떠난 기사 이야기라는 <제7의 봉인>은 살짝 보고픈 마음도 들던데, 성경 내용에 워낙 무지해 보고도 못알아먹을 것 같아서 쫌;;

 

암튼 잉그리드 버그만은 참 아름답고 우아하게도 늙었다. 스웨덴어와 영어를 넘나드는 자연스러운 연기와 표정, 자부심 강한 피아니스트에 딱 맞는 고상한 자태, 예술가 특유의 예민함까지 대단하다 싶었다. 간간이 흘러나오는 클래식 곡들을 내가 좀 더 알았더라면 더 좋았겠으나, 뭐 몰라도 괜찮았다. 같은 곡을 연주해도 엄마의 쇼팽(쇼팽 맞던가;;;)과 딸의 쇼팽이 다른 느낌이라는 건 어렴풋이 알겠던 걸(진짜로 차이를 알았는지 배우들이 설명해준 거로 그렇다고 느낀 건지 잘 모르겠음을 실토;;).  

 

영화 초입에 에바의 남편이 편지쓰는 아내를 몰래 지켜보다,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아내의 책 구절이라며 읽어주는데 그 문장이 결국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 같다. "인생에도 연습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끊임없이 애쓰고 있다."(몹쓸 기억력으로 정확히 이런 문장인지는 자신 없으나 이런 의미였음) 엄마 노릇, 딸 노릇, 사람노릇도 죽을 때까지 계속 연습하고 애써야 할 것이다. 암, 그렇고 말고.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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