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펀트 맨

놀잇감 2011. 1. 31. 16:10


방바닥을 뒹굴거리던 일요일 오후 신경질적으로 리모컨을 돌리다 운 좋게 기회를 잡았다. 지금까지 잠깐씩은 적잖이 이 영화를 접할 기회가 있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다 감상한 건 아마 처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신빙성 떨어지는 내 기억으론 방 한칸짜리에 살던 어린 시절 TV 주말의 명화 정도로 방영되는 바람에 선택의 여지가 없어 무서워하며 보았던 것 같은데, 그것 역시 왜곡된 기억이었다. 1980년작품이라니, 바로 그해나 다음해에 수입되었다고 해도 중학생 때 처음 보았다는 뜻이고, TV영화로 본 게 확실하니 수입연도가 더 뒤로 간다면 고등학생 때였을 확률도 있다. 어쨌거나 그 아련한 기억 속의 더빙 영화에서 발음 부실하고 종종 침까지 흘리는 엘리펀트 맨 존 메릭의 역할을 맡았던 성우가 배한성 씨였다는 건 퍽 생생하다. 종소리가 짤랑거리는 듯한 구슬픈 메인 테마 음악도 귀에 몹시 익고.... 어제 본 EBS 영화는 자막이었지만, 간혹 내 귀엔 배우 존 허트의 음성과 배한성 씨의 더빙 대사가 서로 뒤엉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시기가 언제든 부분적으로 상당히 깊이 각인된 영화였음은 틀림없다. 마음이 아프고 계속 지켜보기 불편하다는 이유로 중간에 포기를 했을지라도, 확실히 한번 보면 쉽게 잊기 어려운 작품이다. 
당시엔 병명도 모른채 그저 '괴물'로 손가락질 받던 다발성 신경섬유종증 환자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는 아무 이유 없는 인간의 악의가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선의나 호의 또한 얼마나 이기적일 수 있는지도.
흔히 빅토리아시대라고 일컫는 19세기 중후반은 유럽열강의 제국주의가 절정일 때였고, 몹시 팽배한 인종주의 편견은 식민지에서 데려온 '신기한' 인종을 구경거리로 내세운 '괴물쇼'(freak show)를 유행시켰다. 신의 저주 또는 자연의 오류인 구경거리를 바라보며 인종적인 우월함을 맛보는 것이 제국주의자들의 유희이자 오락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시대에 신체 기형을 안고 태어난 존 메릭은 당연히 부모에게 버림 받고 서커스단에서 코끼리처럼 울부짖는, 말귀 알아듣는 짐승 취급을 받으며 살아야 하는 존재였다. 저자거리에서 그를 발견한 의사(앤서니 홉킨스)는 그를 런던의 병원으로 데려와 치료를 해보려고 하지만, 그가 해줄 수 있는 건 깨끗한 환경과 의복을 제공하며 존 메릭에게 '인간적인' 대우를 하는 것뿐이다.
엘리펀트 맨 존 메릭이 의외로 '지적인' 소통이 가능한 존재임이 알려지면서 존 메릭과 의사는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되고, 황송하게도 왕실과 상류층 사교계 인사의 관심까지 쏟아진다. 하지만 상류층 인사들과 교류한다고 해서 '구경거리'인 그의 사회적 위치가 달라진 건 아니다. 푼돈을 내고 몰래 병원 창문으로 신기한 괴물을 구경하러 오는 서민들이나, 고가의 선물을 들고 와 엘리펀트 맨을 접견하는 상류층 인사들이나, 그에 대한 혐오감과 두려움을 감추지 못한 채 열등한 존재로 여기는 건 똑같다.
결국 존 메릭을 똑같이 구경거리로 만들어 개인적인 명성을 쌓는데 이용했다는 자각을 얻은 의사와, 사교계 인사로서 제일 처음 엘리펀트 맨을 찾아가 "당신은 엘리펀트 맨이 아니"라며 "로미오"라고까지 극찬했던 런던 극장의 켄델 부인의 경우엔 확실히 다른 인간들과 달랐다고 낭만적으로 생각하고 싶지만, 시대가 시대임을 감안할 때 정말로 그랬을 것 같지는 않다. 그 점이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한계였을 것 같기도 하고...
또 다시 안온한 동물원 우리를 떠나 유럽을 떠돌며 서커스단의 학대와 멸시를 받던 존 메릭이 죽어가면서나마 일시적으로 다시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풀어주는 이들은 그와 똑같이 '괴물'이자 '구경거리' 취급을 받는 서커스단 단원들이다. 똑같은 소외계층의 도움으로 다시 런던으로 돌아온 그는 자기는 동물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항변하며 스스로 죽음을 맞이한다. 호흡곤란 때문에 평생 제대로 누워보지 못하고 앉아서 자야했던 한을 풀듯, 포근한 잠자리에 처음으로 반듯하게 누워서.
150년이 지났지만 엘리펀트 맨 같은 존재를 극단적으로 멀리하거나, 구경거리로 삼거나, 겉으로 수용하는 체 하며 속으론 혐오스러워하는 인간의 악의는 별로 변한 게 없는 것 같다.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을지 잘 모르겠지만, 최근 뉴스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소말리아 해적들의 존재도 그러하다. 그들의 행위 자체가 그릇된 것임을 모르는 이는 없겠지만, 대체 어떤 법적, 논리적, 이론적 근거로 그들을 이 나라 재판장에서 단죄할 수 있을지 정말 모르겠다. '해적'이라고 하면 조니 뎁을 가장 먼저 떠올리는 나의 이상한 편견이 작용했다고 하더라도, 작금의 모든 상황을 '대단한 구경거리'이자 '무용담'으로 포장하고 자랑하려는 혐의를 지울 수가 없다.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고 구출한 것은 국가의 의무이지, 틈틈이 자랑할 사안은 아니지 않은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물다는 해적 재판의 추이가 과연 아직도 다른 해적들에게 억류되어 있는 금미호 선원들의 신변에는 어떤 파장을 미칠지 나는 그게 두렵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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