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혹이 흔들리지 않는 나이이긴 개뿔, 지금 돌아보면 전과 변함없이 유치하고 철없이 살았던 것 같다. 다만 인간 나이 마흔쯤 되면 이루어놓았을 것으로 예상했던 것들이 하나도 없어서 민망하고 위축되었을 뿐. 그렇게 또 어영부영 사십대를 보내고 나니 왜 옛날 사람들이 인생을 10년 주기로 달리 표현하고 전환점을 삼았는지 알 것도 같다.

인간에게 오십이란 나이는 확실히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의 측면에서 엄청난 변화를 겪는 시기다. 물론 삼십대 때도, 사십대 때도 밤샘 작업을 했다거나 몸을 많이 쓸 일이 있었을 때, 피로도가 전과 달라서, 아이고 몸이 하루가 달라...라며 엄살을 부렸다. 그러나 그때 느꼈던 신체의 쇠락이 막연한 서글픔과 약간의 피로감이었다면, 오십을 넘어서 느끼는 신체 변화는 어찌나 극적인지 '노화는 결국 질병이었구나' 깨닫는다. 

갱년기는 남녀 모두 겪는다고 하지만 특히 여성들은 차츰 여성호르몬이 줄어들다 폐경(혹은 완경)에 이르면 너무도 낯선 심신의 변화를 겪는 것 같다. 가끔 자긴 갱년기를 모르고 지나갔노라고, 안면홍조증이나 열감도 전혀 없었다고 자신하는 이들이 있어 안심했었는데 '지랄총량의 법칙'처럼 그런 증상 또한 평생에 한번은 꼭 겪어야하는 건지, 60대에 이르러 새삼 갱년기 증상으로 괴로워하거나, 아니면 사십대 후반과 오십대 초반에 다른 더 무서운 질병의 형태로 발목을 잡히는 걸 목격한다.

작년, 재작년부터 지인들 가운데 암환자가 부쩍 늘었다. 한 친구는 사십대에 조기폐경을 하고도 아무런 갱년기 증상이 없었다. 귀찮은 생리에서 자유로워지니 정말 세상 편하다고 한두 살 어린 우리들에게 어서 편한 어른들의 세계로 넘어오라고 농담처럼 말했었는데... 작년에 췌장암 수술을 받고 투병중이다. 두살 어린 친구도 얼마 전 자궁과 난소에 암이 생겨 수술을 받았다. 다섯살 어린 후배 역시 조기폐경인가 싶어 검진을 받았더니 위암이었고 복막에도 전이가 되어 아직 수술도 하지 못하고 항암중이다. 두 살 많은 선배 한 사람도 최근 대장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앞두고 있다. 어휴. 

건강한 줄 알고 지내다가 갑자기 암환자로 전락한 지인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다들 안면홍조라든가 겨울에도 갑자기 더워져서 얼음물을 들이키고 선풍기를 틀어야한다는 열감 같은 갱년기 증상이 없었다. 그냥 오십이란 나이를 수월하게 맞이하거나 지나가고 있구나 생각했다고 한다. 나와 9살 차이나는 막내고모도 흔히 호소하는 갱년기 증상은 없었으되 면역력이 갑자기 떨어지면서 원인불명의 자가면역질환으로 오십대 중후반 몇년간 혹독하게 아팠다. 나 역시 2, 3년 전부터 수족냉증을 차츰 떨쳐버릴 만큼 체온이 좀 올라간 듯하고 더운 걸 못참게 되기는 했지만 얼굴이 확 달아오르거나 후끈후끈 열감에 시달린 적은 없었다. 작년에 드디어 완경을 선언하며 이 정도면 나 역시 불편한 월경에서 자유로워진 걸 완전 기뻐하면 되겠구나 생각했었다.

그러다 올초에 갑자기 허벅지 통증으로 2달쯤 심하게 고생을 했고 병원을 전전했지만 결국엔 원인을 알아내지 못했다. 온갖 값비싼 검사로 병원비만 날렸을 뿐이다. 단일신경염일 가능성이 가장 높으나 그건 검사로도 알아낼 수 없다나. 투덜대는 내게 아는 의사쌤이 농담처럼 말했다. 인간의 생명과 직결된 심각한 중병은 이제 거의 다 치료법이 개발되어 있지만, 소소한 질병의 대부분은 원인조차 모르는 게 태반이라 진단만 제대로 내리면 치료의 절반은 된 셈이라고. 대학병원 의사가 내게 통증에 효력이 있는 소염진통제를 찾은 게 어디냐고, 감사해야할 일이라고 말했던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하여간 다행이도 이젠 다리도, 소염진통제 때문에 뒤집어졌던 위도 거의 멀쩡해졌다. 통점이 완전 사라진 건 아니어서 살짝 무리를 하면 저기 아래쯤에서 스멀스멀 그날의 느낌이 되살아나지만, 성난 짐승 달래는 요령이 생기듯 나 역시 얼른 자세를 바꾸고 휴식을 취하고 염증에 좋다는 온갖 건강보조제를 삼키며 심신을 다스리고 있다. ㅠ.ㅠ 비전문가로서 내가 짐작하는 건 확실히 오십대에 접어들며 호르몬 변화 때문이든, 인체의 장기가 원시시대부터 입력된 DNA대로 수명을 다한 것이든, 모든 면역력이 확~~ 떨어진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누구나 갖고 있다는 암세포는 체온이 내려갔을 때, 그러니깐 면역력이 떨어졌을 때 활동성이 높아지므로, 갱년기에 유독 몸에 열이 많이 나서 밤마다 땀흘리며 괴로워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심각한 질병에서 멀어지는 것 같다. 흔한 신체 변화를 겪으며 이 시기를 지나간다는 건 차라리 건강하다는 반증? 

호르몬이 급격하게 변했는데 신체증상이 없으면 반길게 아니라 오히려 걱정을 해야하는지도 모른다. 발열반응을 보여야하는 건강한 세포들이 어딘가 다른 데 몰려가서 엉뚱한 짓을 벌이고 있는 나쁜 세포들과 싸우고 있을 가능성이 있으니까. 그래서 누군가는 나처럼 이유없는 염증이 생기고, 누군가는 암세포가 몸에 자리를 잡고, 누군가는 자가면역질환을 앓는 게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렇게 건강을 자신했던 주변 지인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중병 환자가 되는지 영문을 모르겠다. 스트레스가 만병의 원인임을 안다해도 어떻게 스트레스 없는 삶을 산단 말인가! 

2년에 한번씩 건강검진을 해보면, 체중과 근육량 때문에 성분검사에서 신체나이만 젊게 나올뿐 ㅠ.ㅠ 여기저기 성한 구석이 하나도 없다. 표재성 위염도, 약간의 빈혈도, 그밖에 몇 가지 증상들도 흔하게 다들 갖고 사는 거라지만, 막상 몇년 전 실비보험을  들으려 하니 퇴짜를 맞았다. 와, 나 겉포장만 멀쩡해보일 뿐 이제 보험도 못드는 몸이 되었네! 라는 생각에 어찌나 씁쓸하던지. 

건강염려증 환자로 살고 싶진 않으면서도 일단 한번 호되게 아프고 나니 자신감이 더 바닥으로 떨어졌다. 해서 면역력을 높이고 염증에 좋다는 어성초도 먹고, 새싹보리도 먹고, 비타민도 챙겨먹고, 가능한 한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삶으로 바꿔보려 노력중이다. 일단 금세 피곤해져서 무리를 할 수도 없고!  ㅋ 인간은 결국 모든 나이를 처음 경험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으니 현재 나이에 적응이란 죽을 때까지 불가능한 목표같다. 달라진 심신에 적응할라치면 또 훌쩍 늙어버리는 걸 어쩌라고. 죽는 건 겁나지 않아, 죽도록 아플까봐 그게 겁나지. 내가 감히 깝죽대며 늘 입에 올리던 말인데 이젠 더 나이드는 것부터 겁이 난다. 인생의 전환점을 꼴까닥 넘긴 지금...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짧을 것은 확실한데, 앞으로 또 얼마나 더 심신을 괴롭히는 복병들이 나타날까. 에효.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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