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여성 페미니스트'라고 할 때 퍼뜩 떠오르는 몇몇 인물 중 한 사람인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길 위의 인생>을 읽었다. 어느덧 80세가 된 투사 활동가의 이야기 속엔 인상 깊은 구절들이 수없이 많았지만, 독자 입장에선 나와 연결된 듯한 사연이 특히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다. 사주관상에 익숙한 한국인이라면 딱 '역마살'이라고 표현할 만큼 평생 돌아다니며 산 작가의 인생도 신기했고 (나 역시 현실이 따라주지 않을 뿐 수시로 품는 여행 로망을 역마살 탓이라 여긴다), 그보다 더 인상적인 건 작가 어머니의 우울증이었다.  별 내용도 아닌데 나에게 위로가 되었던 구절은 바로 이것.

"어머니는 슬픈 영화나 상처 입은 동물처럼 아주 사소한 것으로도 우울증이 도질 수 있었다." - <길 위의 인생> 204쪽.

와, 우리 엄마만 그러시는 게 아니구나! 이런 동병상련? 위로받는 느낌? '우울증'이 단순한 개인의 감정 기복이나 의지박약이 아니라 병증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건 서구에서도 현대사회에 들어서 가능했던 일이라고 한다. 전쟁 이후 먹고 살기 바빴던 6, 70년대의 한국 사회에서 우울증은 당연히 별것 아닌 나약함의 표상이거나 괜한 투정이거나 '귀신의 소행' 쯤으로 생각됐던 것 같다. 내가 갖고 있는 어린 시절 최초의 기억이 굿하는 장면이고, 무섭게 생긴 무당이 수돗가에 쭈그려 앉아 고개를 숙인 우리 엄마에게 살아 있는 닭을 던져 푸드득 날아올라 엄청 무서웠던 게 생각난다는 고백을 서른 살 무렵 처음 털어놓았을 때 이모가 엄청 놀라셨던 적이 있다. 그거 너 서너 살 때 일인데 어떻게 그걸 기억하냐며. 시집살이가 고됐던 게 원인인지, 아니면 알 수 없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그건 모를 일이지만 마음에 병이 든 엄마 상태를 외할머니는 굿을 해서 해결하려 했던 모양이다. ^^ 물론 무당굿은 우울증에 아무런 효험이 없었고, 엄마는 결국 당시 드물게 신경정신과 진료를 했던 고려병원(현 강북 삼성병원) OOO박사의 초창기 환자가 되었다.

그러니까 내가 아는 한 엄마가 우울증과 싸워온 역사가 최소 50년 가까이 된다는 뜻이고, 어린 시절부터 몇년에 한번씩 찾아오는 엄마의 우울증(조울증)과 투병과정을 지켜보며 나는 수많은 의문에 휩싸였다. 첫번째 의문은 우울증 발병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것. 외가 쪽에선 '멀쩡했던' 엄마가 시집 가서 애 낳고 살다 우울증에 걸렸으니 호된 시집살이와 가난이 이유일 거라고 친가 탓을 했었다.  그럴 법한 추론이지만, 정말로 최초의 우울증 발병이 결혼 이후일까 하는 점에 대해선 친척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엄마 본인도 그 점에 대해선 확신이 없으신 것 같고...

하여간 어려서부터 줄곧 지켜보며 나름대로 내가 파악한 우울증 촉발 인자는 대체로 갱년기, 계절 변화, 스트레스였다. 처음 폐쇄병동에 입원까지 해야했을 정도로 엄마의 우울증이 조울증으로 심해졌던 건 내가 스무살 때였는데, 사십대 후반으로 접어들며 엄마가 호르몬의 급격한 변화 때문에 우울증이 심해지지 않았나 짐작된다. 째뜬 과거의 엄마는 몇년에 한번씩 우울증이 재발했을 때만 정신과 약을 먹고 치료를 받았으나, 언제부턴가 1년 내내 우울증 치료제를 하루도 빠짐없이 먹고 있는데도 노년이 된 엄마는 이제 일년에도 몇번씩 증상이 오락가락 좋아졌다 나빠지기를 반복해 자꾸 약을 바꿔야하는 지경이다.

작년에도 11월부터 상황이 나빠져 정말 힘들었고, 넉 달이 지난 올해 설날 무렵에야 비로소 우울증이 좀 진정세를 보였다. 투약 종류와 양을 조금씩 늘리고 줄이기를 반복하다 더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거의 정상 상태'가 되었다고 주치의가 안심했던 게 지난 4월 초였는데... 말짱한 기간을 한달도 채우지 못하고 엄마는 지난주부터 다시 불안 상태에 접어들었다. 아니 대체 왜 또? ㅠ.ㅠ

스타이넘의 어머니처럼, 울 엄마의 우울증이 다시 도지는 이유도 이젠 딱히 꼽을만한 게 없다. 일조량이 달라지는 환절기라든지, 명절의 부담감이나 친척의 중병 같은 스트레스 상황이라면야 그러려니 하겠는데, 환절기도 잘 지나갔고 딱히 '이슈'도 없는 요즘 대체 왜 그러시는가 말이다. 다른 때도 아니고 어버이날 기념으로 예쁜 손주들과 자식들 만나 맛있는 거 먹고 용돈도 받고 그러시는 행복한 시기에 하필 참나. 불안 증세가 심해지고, 그러면 약을 먹어도 잠들지 못하는 불면이 이어지고, 불안이 깊어지면 도리어 흥분 상태가 되거나 무기력증을 보이기도 하는데, 부디 이번엔 너무 길지 않게 살짝만 앓다 지나가면 좋겠다. 가족이 아프면 다른 가족도 덩달아 아프고 맥빠지는 게 당연한 일이라, 엄마의 우울증 때문에 괴로운 마음을 당분간은 블로그에 풀어볼 작정이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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