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때 2011. 2. 1. 16:47

받는 세뱃돈보다 주는 세뱃돈이 많아진지 오래됐다. 그래서 올해도 세뱃돈을 준비하러 오전에 은행엘 갔었는데 그나마도 1인당 10장씩밖에 못 바꿔준다던 신권이 하필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던 나보다 두 명 앞에서 끝나버렸다. ㅠ.ㅠ 작년에도 똑같이 게으름 부리다 연휴 전날 은행에 갔어도 신권으로 바꿀 수 있었는데, 올해는 한국은행에서 비용절약을 빌미로 신권을 덜 만들었다나 뭐라나...

어차피 똑같은 돈이지만 어려서부터 세뱃돈으로 빳빳한 새돈을 받으면 기분이 달랐다. 해마다 세뱃돈으로 부모님께 받은 빳빳한 신권은 '종돈'이라고 해서 일년 내내 지갑 제일 안쪽에 넣어두고 쓰지 않는 나름의 전통도 있었다. 설날에 세뱃돈을 받으면 다시 새 걸로 바꿔넣으며 일년 내내 지갑에 돈이 마르지 않기를 비는 일종의 미신이지만, 그래도 비상금 겸 종돈으로 신권을 넣고 다니는 기분이 꽤 쏠쏠했는데, 나도 왕비마마도 신권 바꾸기에 실패했으니 이걸 어쩐다.

하는 수 없이 헌돈 중에서 그나마 깨끗한 것들로 골라 담아 세뱃돈 봉투를 만들었다. 우선 왕비마마께 드릴 세뱃돈을 가장 넉넉히 챙겨 넣고, 나름 공평하게 금액에 차등을 두어 만든 조카들의 세뱃돈 봉투엔 몇마디 덕담도 적었다. 철 모르는 조카 녀석들도 설날이 '대목'이란 걸 벌써부터 아는 눈치다. 하기야 어린시절 나도 그랬다. 친가, 외가 이틀에 걸쳐 열심히 어른들께 세배를 올리고 나서 색동 복주머니에 잔뜩 담긴 세뱃돈을 나중에 챙겨보면 어찌나 뿌듯했던지. 대개는 엄마한테 헌납해야 했지만, 나중엔 일부만 빼앗기고 직접 저금하겠다고 박박 우겼던 것 같다. 세뱃돈 모아서 사고 싶은 물건이 얼마나 많았는데...

부모님 형제들이 워낙 많아서 설날 세뱃돈을 다 모으면 정말로 엄청난 거금이었다. 세뱃돈을 받는 입장인 우리로선 신나는 노릇이었지만, 나와 같은 항렬의 사촌들만 열두어 명씩 됐으니 세뱃돈을 챙겨야 하는 어른들로선 꽤나 성가신 일이었을 거다. 조카들이 나이가 많아지면서 세뱃돈의 액수도 덩달아 늘어나야 했을 테고. 아직은 넷 밖에 안되긴 하지만 나도 앞으로 15년 이상은 녀석들 세뱃돈을 꼬박꼬박 챙겨야 할 운명이다. 힝... 사촌동생들이 출가하면 조카들은 더욱 늘어나겠지!

어쨌거나 여전히 세배를 받는 회수보다 세배를 하는 횟수가 더 많다는 게 난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모두의 시선을 등판과 엉덩이로 받으며 어르신들에게 세배를 하는 일이 고역이긴 하지만 (어렸을 땐 꼭 한복을 입고 세배를 했는데 절을 할 때나 끝내고 일어날 때 치맛자락을 밟는 난감한 사태가 벌어질까봐 너무도 두려웠었다), 세뱃돈을 안받는 어른이 됐더라도 친척분들한테 두루두루 한해 인사 올리고 받는 덕담도 푸근하다. 결혼 채근 따위는 아무리 해도 소용없음을 깨달은 집안 어른들 덕분이다. 해마다 내겐 다들 책 대박 나기를 빌어주셨으니 언젠가는 정말 그럴 날이 오지 않겠나. ㅋㅋ 그러고 보니 조카들한테 세배 받으며 근엄하게 던져줄 덕담도 고민해놔야겠다. 세뱃돈 봉투에 적은 거랑은 다르게 해야 하는데... 빳빳한 신권으로 준비 못한 세뱃돈 대신 상큼하게 얹어줄 지혜로운 덕담이 생각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