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꾸러미

참 잘했어요

입때 2009. 7. 16. 12:46

일주일에 한번꼴로 장을 보러가는 집 근처의 OOO마트는 까마득한 옛날부터 있었던 낡은 상가 건물 1층에 있다. 재래시장과 마주보는 위치이기도 하고, 워낙 옛날 건물이라 지하 주차장 따위가 갖추어져 있을 리 없으니 건물 앞 도로에 구획이 그려진 노상 공영주차장을 이용해야 한다. 마트 바로 앞쪽 주차구획을 이용하면 무료 주차 확인 도장을 받아 처리할 수 있으므로, 뱅글뱅글 멀미나게 지하주차장에 내려가 폐소공포증 비슷한 두려움에 젖을 필요도 없고 오히려 시간도 절약된다. 
내가 식탐이 많기도 하지만, 고른 영양분 섭취까지 신경써서 나름대로 메뉴를 짜 사들이는 일주일치 장보기의 양은 꽤나 거대하다. 무거운 건 배달을 시키고 신선식품만 먼저 들고오는데도 낑낑거려야할 때가 많으므로 나는 최대한 마트 입구에 가까운 주차공간을 찾는 편이다. 따라서 마트에 갈 때마다 만나는 공영주차장 요원 아저씨도 늘 동일한 분인데, 내가 그간의 긴 공백을 어렵사리 접고 드디어 끼적거림을 시작하게 된 동기는 바로 이 아저씨다.

처음 이 아저씨를 만났을 때가 언제인지 모르겠는데 그리 오래 된 것 같지는 않다. 길어야 1년 반 정도.
낯선 사람과 쓸데없이 말 섞는 걸 싫어하는 내가 처음 차를 세운 뒤 이 아저씨를 만나고 뜨악했던 순간이 아직도 기억나기 때문이다. 마트 입구쪽에 차를 세우면 그간 다른 주차요원 아저씨들은 아무 말 없이 시간만 표시한 종이를 앞 유리창에 끼우거나, 그나마 친절한 분들이 "마트가냐?"고 묻고는 도장 받아올 종이 반쪽을 찢어 건네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 그 아저씨는 일단 차가 접근하면 운전을 잘하는 사람이든 아니든 무조건 양팔을 휘저어 반색하며 주차를 돕고는, 차에서 내리면 이렇게 말한다. "잘 하셨습니다!" 이면도로에 계속 오가는 차들이 있으니 주차과정이 험난할 때도 있는데, 이 아저씨는 위험하다 싶을 정도로 몸을 던져 주차를 도울 때가 있다. 저러다 차에 치이지 싶을 정도로...
그러고는 마트에 간다고 하면 "아유, 잘 오셨어요."라며 주차증 반쪽을 찢어주는데, "잘 다녀오세요."라는 인사도 잊지를 않는다. 과잉 친절에 어색해지는 나 같은 사람은 얼른 "네"라고 대꾸하고 머쓱해서 장을 보러 도망치듯 들어가게 됐는데, 처음 장을 보고 나와서 나는 좀 짜증이 났었다.
그 아저씨의 일처리가 어쩐지 굼뜨고 느렸기 때문이었다. 마트에서 찍어준 확인 시간을 초과하면 돈을 더 내야하는 상황은 이해하지만, 내 경우는 하도 장을 많이 봐서 대부분 시간도장을 넉넉히 찍어받기 때문에 주차증만 척 봐도 알텐데 이 아저씨는 주차증 시간과 자기 시계, 그리고 또 다른 장부에 적힌 기록을 꼼꼼이 확인하지 않고는 보내줄 생각을 않기 때문이다.
뭐가 그리 바쁜지 늘 빨리빨리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는 것에 길들여진 나는 몇분 안 되는 그 아저씨의 꾸물거리는 태도에 괜히 부아가 났던 것 같다. 실은 그게 일 처리의 원칙임에도 말이다. 처음엔 아저씨가 주차요원 초보라서 그러는 줄 알고 속으로 혀를 찼지만, 1년도 넘게 지난 지금도 그 아저씨의 주차증 확인시간이 빨라지지 않은 걸 보면 그 분은 그냥 원래 그런 분이라는 의미다.
"아유, 넉넉하네요. 잘하셨어요."라고 또 한번 칭찬의 말과 함께 무료주차 확인이 끝나면, 그 아저씨는 또 열심히 오가는 차를 살피고 양팔을 휘저으며 내가 차를 빼기 좋도록 안내를 한다. 이면도로의 주차구획선을 떠나기까지, 제 아무리 운전과 주차에 베테랑이더라도 "오세요, 오세요!" "천천히 하세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조심하세요." "잘하셨어요." "안녕히 가세요."로 이어지는 그 아저씨의 인삿말을 피할 도리는 없다. ^^
언젠가 한번은 그 아저씨가 잠시 화장실에라도 간 듯 옆 구역의 아저씨에게 주차증을 드리고 확인을 받아야했는데, 내가 차를 뺄 무렵 헐레벌떡 달려온 아저씨는 동료에게 "아유, 미안해요."라고 하더니 도장 찍힌 주차증을 확인해 장부에 끼우며 덧붙였다. "잘했어요."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고 늘 하던 자기 일에 <잘했다>는 칭찬을 들은 동료 아저씨의 표정이 궁금해진 나는 얼른 거울을 쳐다보았는데, 예상대로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반면에 칭찬쟁이 아저씨는 정말로 기쁜듯 싱글벙글.

어제도 장을 보러 다녀오며 나는 어린시절 숙제공책에 찍힌 선생님의 <참 잘했어요> 도장처럼 은근히 기분을 좋아지게 만드는, 그 아저씨의 익숙한 칭찬 3종 세트를 듣고 돌아왔다. 
"아유, 주차 잘하시네요." - 다른 차의 주차증을 발급하느라 미처 도와주지 못하는 새에 내가 냉큼  차를 대자
"잘 오셨어요." - 마트에 간다고 하니까
"아유, 넉넉하게 잘 받아오셨네요." - 30분 무료 도장 두개를 쾅쾅 받아온 나의 주차증과 유리에 끼워놓은 주차증에 적힌 시간과 자기 손목시계를 유심히 다 확인하고 난 다음에

도대체 그 아저씨는 어째서 그렇게 매사에 싱글벙글 감탄하고 칭찬하는 삶의 태도를 갖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일처리엔 고지식한 원칙주의자인 것 같지만 타인에 대한 예의와 마음의 여유를 잃지 않는 그 아저씨를 처음엔 버럭 짜증스럽게 여겼고, 아직도 그 아저씨의 "잘하셨어요"라는 말에 민망하다는 생각이 크긴 하지만 나도 본받아야할 점이라는 건 분명하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한다는데 말이지...
칭찬은커냥 입만 열면 뾰족한 꼬챙이로 콕콕 찔러대는 말만 뿜어대고 있는 초절정 까탈스러움을 떨쳐버려야하는데 참, 그게 쉽질 않다. 

오늘은 왕비마마한테 "잘했다"는 말을 최소한 3번은 해보겠다는 다짐의 포스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