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꾸러미

첫인상

입때 2006. 12. 10. 17:36

첫인상이 참 중요하다는 건 알지만
언제부턴가 사람은 역시 겪어봐야 안다는 쪽에 무게를 두게 된다.
고맙게도 첫인상과 나중 느낌이 똑같아 특별히 헷갈리지 않는 사람들도 더러는 있지만
첫인상의 느낌을 그대로 이어가는 사람보다 첫인상이 좀 떨어지더라도 내면이 진국인 사람도 많고, 첫인상은 좋았는데 알고보니 어이없는 인간도 참 많다는 걸
나이와 함께 깨달아가기 때문이다.

더욱이 나는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나쁜 '병'이 있어서
솔직히 처음 잠깐 만나선 첫인상이랍시고 제대로 머리에 담아두지도 못한다.
얼마전부턴 일 때문에 처음 만나 명함을 주고 받게 되면
돌아서자마자 얼른 명함 뒤에 메모를 해둘 정도다. (어느 책에선가 그러라고 귀띔을 해주었는데 그게 나같은 '얼굴치'[란 말이 있는지는 모르겠다만]에겐 정말이지 큰 도움이 되더라)
예를 들어, 반테안경에 짧은 머리, 웃는 인상, 목소리가 허스키, 단 걸 좋아함.. 따위로. -.-;;
물론 출판계엔 여성동지들이 많고, 그들의 헤어스타일이 수시로 변하는 건 나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다. ㅋㅋ

아무튼 나도 그리 강한 인상을 남기는 생김새가 아니므로
내가 돌아간 뒤에 저들도 내 명함 뒤에 동그란 얼굴, 작은 키... 따위의 인상착의를 남길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키나 얼굴 모양 따위의 물리적인 생김새 다음으로 과연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규정하고 기억할까 하는 것이다.

워낙 사람들의 얼굴을 처음부터 기억하지 못하는 덕분에
나의 경우 그들에 대한 첫인상은 두번째 만남까지 유보되는 셈이고
그 사이 전화통화라든지 이메일 같은 수단으로 좀 더 서로에 대한 단서를 파악하게 되면
단지 생김새만 갖고 판단하지 않으면서 나름대로 사람에 대한 폭 넓은 평가가 가능해진다.

그리고 일 때문이든, 단순히 친분 때문이든 역시 사람은 겪어봐야 안다는 전제를
한자락 깔고 사람을 대하기 때문에, 첫인상만 갖고 함부로 사람을 판단하던 어렸을 때처럼 섣불리 마음을 다치거나, 또는 성급한 편견 때문에 후회하는 일은 줄어드는 것 같다.

남들에 대해선 이렇게 내가 비교적 너그러운 잣대를 갖게 되었는데,
그럼, 다른 사람들도 나를 그렇게 너그럽게 보아줄까?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한다.
사람의 사고방식과 행동이 얼굴에 드러난다는 뜻일 테고
요즘 한참 '동안 열풍'이 부는 것도 부지런하고 열심히 자기관리를 한다는 뜻에서
일맥상통한다 할 수 있을 거다.
물론 어마어마한 액수의 '견적'을 받아 과학기술의 힘으로 만드는 억지 동안 말고.. ^^

무조건 어려보이는 게 좋은 건 아닐 테지만,
어쨌든 나 역시 그간 나이보다 어려보인다는 얘기를 많이 들으며 속으로 몹시 기뻐했는데
얼마 전부터는 제법 내 나이대로 보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다.
어쩌면 그게 당연한 것인데도, 그런 얘기를 들으면 공연히 속이 상하고 거울을 보며 새삼 반성을 하게 된다.
물론 남들은 20대에 이미 시작한다는 마사지며 피부관리 따위 전혀 안하고
피부에 천적이라는 밤샘을 밥먹듯이 하면서 이 정도면 뭐 훌륭하지!.. 라고 자위도 해보지만
며칠 잠 못자고 푸석한 얼굴로 훤한 햇빛 속에 누군가를 만나러 나갈 때면
나도 모르게 이맛살이 찌푸려지고, 결국 그만큼 '액면가' 내 나이도 많아 보이는 게
당연할 거다.

거기다 얼마전부터는 나를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들의 평가 때문에 조금 더 조심스럽다.
얼마 전 여행을 갔을 때도 그랬고,
엊그저께 후배 아기 돌잔치에 갔을 때도 그랬는데
사람들이 잠깐동안의 내 말투와 겉모습만 보고도 내 직업을 얼추 맞혔기 때문이었다.
한결같은 그들의 짐작은 '글쓰는 일과 관계된 사람이 아니냐?'는 것이었는데
나로선 그게 칭찬인지 비난인지 걱정스러웠다.

농담삼아 내가 '설마 그거 잘난체 해서 재수없다는 뜻은 아니겠죠?'라고 되물으니
다들 까르르 웃었는데, 나로선 내심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글로 먹고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이 갖고 있는 전형과 편견이란 게
먹물 좀 들었다 싶게 굴면서, 뭔가 현학적인 체를 한다거나 결국 좀 잘난 척을 하는 모습
아닌가 말이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인간 유형이 잘난 체 하는 사람인데
내가 그런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다니.. 살짝 공포스럽다.

그동안 겨울 오는 게 우울하답시고, 또 바쁘답시고 까칠하게 굴며 지낸 내면의 변화가
드디어 내 얼굴까지 흉측하게 좀먹은 건 아닌가 싶어 걱정도 되고
나도 모르게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는 인간형이 된 건 아닌가 싶어 염려된다는 얘기다.

나는 진짜 글쟁이도 아니고, 다른 진짜 글쟁이들의 글에 매달려 간신히 덩달아 살아가는
반편 글쟁이인 셈인데도 그간 생색만 거나하게 내고 지낸 건 아닌가.

부디 내 얼굴에 책임질 나이에 걸맞는 만큼의 무게가 실린 거라 빌면서도
동시에 세상사람들의 '나이값'이라는 잣대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전천후 동안으로 계속 남고 싶은 턱없는 소망이 더 크다.
나는 나이값 못한다는 소리가 정말정말 싫은데
거기다 직업값도 못한다는 소리마저 듣는다면 얼마나 절망스러울까. 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