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꾸러미

가방을 지르다

입때 2006. 12. 5. 21:49
'지르다'는 말이 언제부터 물건구매를 뜻하게 됐는지는 몰라도
별로 천박하거나 상스럽지 않으면서 딱 어울리는 말인 것 같아 마음에 든다.
'지름신의 강림'도 재미있는 말이고 ^^;;

다행히 나는 뭘 그리 쉽게 지르는 편이 아니라
사고 싶은 게 눈에 띄면 마치 충동구매를 하는 것처럼 호들갑을 떨긴 하지만
이미 마음속으로 오래 고민하고 이러저리 재보고 선택한 결과일 때가 많다.
이번에 장만한 검정색 큰 가방도 그렇다.

원래 작은 가방보다는 이것저것 쑤셔넣을 수 있는 큰 가방을 좋아하는데
다행히 작년부터였나 오버사이즈 가방이 유행이라 속으로 옳다구나 싶었다.
정말 마음에 드는 물건을 고르는 데 오래 걸리는 단점이 있긴 해도
정작 그런 물건을 손에 넣으면 최소한 10년쯤은 사랑해주는 것이 또 나의 검소한(?)
습관이라, 이번엔 좀 크게 지르는 한이 있어도 정말정말 마음에 꼭 드는 가방을 사겠노라고
결심했기 때문이다.

내 머리속에 그리고 있던 나의 이상형 가방은 이랬다.
일단 큼지막하면서, 너무 과도하게 커서 짜리몽땅한 내 몸집과 완전히 어울리지 않는 크기는 아니되, 디자인은 그리 복잡하지 않고
재질이 부드러운 가죽이면 좋겠고, 색상은 검정색이나 진한 파랑, 버건디도 괜찮겠고
쇠장식은 번쩍이는 것보다는 이왕이면 무광이면 좋겠다는 것.

그/러/나
불행히도 작년부터 내가 찾고 있는 가방은 그리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명품따위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실은 누릴 능력이 없는 건지도.. ^^;;)
명품이랍시고 과연 브랜드에 그만한 돈을 쓸 가치가 있는지 아직도 납득을 할 수는 없지만  
하도 오래 마음에 꼭 드는 가방을 찾다보니
명품 중에 혹시 내 가방이다 싶은 게 있으면 10년 쓸 셈 치고 질러줄 수 있다고까지
생각했으나... 다행스럽게도 색과 가죽이 마음에 들면 장식이 너무 호화롭거나
모양이 이상하거나, 너무 번쩍이거나 요란하거나... 디자인이 마음에 들면 가죽이 아니라 합성피혁이거나.. 지금 갖고 있는 것과 너무 비슷하거나... 아무튼 그랬다.

그런데 또 과도하게 욕심을 부리며 나만의 잣대를 고집하다보면
엉뚱한 데서 타협이나 포기를 하는 계기를 만나기도 한다.
물론 내 귀가 얇은 탓이겠지만,
내가 시켜놓고 그냥 남기고 가는 물 한잔,
커피숍에서 잔뜩 시켜놓고 마구 낭비하는 하얀 종이 냅킨,
내가 입고간 겨울 외투 후드에 달린 라쿤털까지
어느 것 하나 그냥 보아 넘기지 않고 조목조목 환경문제를 따져가며 전지구적인 환경오염을 염려한 어느 캐나다인의 핀잔을 들었기 때문이다.
완전 초면이었는데도
겨우 나 하나가 아낀다고 뭐가 달라지겠어...라는 자조적인 나의 변명에 그는 일침을 가했고
최소한 둘의 하나는 동물을 죽인 시체를 옷에 달고 다니는 한국인들을 놀라워했다. ㅠ.ㅠ

그러고 보니 내 겨울옷에도 전체는 아니지만 양, 라쿤, 토끼, 밍크의 시체 일부가
달린 게 절반은 넘는 듯했다.
살아 있는 양털을 잘라 모직 옷감을 만드는 건 괜찮지만 양을 죽여 무스탕을 만드는 건 엄연한 살육이라나 뭐라나...

대화가 더 깊어지면 채식주의에 대한 옹호와 반박으로 심화될 것 같아
당시엔 흐지부지 대화를 마무리하고 돌아왔는데...
며칠 뒤면 캐나다로 돌아가 또 언제 오게될지 모를 출장지에서조차 지구 환경과 미래를 염려하는 그 사람을 보니,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들었고
겨우 한시간 남짓 나눈 대화로도
오로지 '가죽'을 고집하던 내 가방 찾기에도 방향의 전환이 있었던 거다.
(물론 가방을 아예 안사는 쪽이 이 지구를 위해 더 좋은 선택이겠지만 -_-;;
그래도 나는 경제의 활성화를 위해 소비를 하는 쪽을 택했다 ;-P)

'그래, 꼭 가죽이 아니면 어때'라고 생각하고 나니
선택의 폭이 와장창 넓어진 데다, 아득바득 머릿속의 이상을 고집하던 마음도
훨씬 누그러져 마음에 드는 가방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는 얘기다.

따져보면... 가방에 달린 쇠장식은 무광이 아니라 유광이고
주렁주렁 달린 주머니도 내 취향에 비해선 좀 과한 것 같긴 하다. ^^;
하지만 가죽 재질을 포기하면서, 가격대도 그만큼 저렴해졌으니
나도 몇 가지는 수긍해야 당연한 것 아니겠나.

그냥... 크기가 마음에 드는 검정색 가방을 장만했다는 걸 더 기뻐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 가방은 10년 가까이 아끼고 사랑해줄 수 없다는 걸 알기에 ㅡ.ㅡ;;
아직도 내 이상형 가방이 어디선가 눈에 띠길 바라는 마음이 저 밑바닥 어딘가엔
자리잡고 있는듯...
가방을 어서 새로 장만하고 싶은 내 조바심과 얇은 귀가 선뜻 타협을 선택한 반면에
내안의 가방 지름신은 아직 만족하지 못한 탓일 게다. ㅎㅎ

<미아의 요청으로 폰카로 급히 찍어 올림 ㅋㅋ 얇은 귀라 불러주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