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꾸러미

제사 다음날

입때 2008. 12. 1. 15:58
그날은 몹시 추웠다.
크리스마스 연휴를 맞아 친구들과 설악산 콘도에 놀러갔다 밤늦게 돌아온 크리스마스 이브,
이상스레 음산하고 어두운 집을 엄마가 홀로 지키고 있었다.
낮에 할아버지가 길에서 쓰러지셔서 응급실로 옮겼지만 위중한 상태라는 이야기를 전하며 엄마는 병원에 가보겠다는 나에게 그냥 집에 있으라고 했다. 
안절부절 다가온 크리스마스 새벽에 결국 할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열명도 넘는 가족들이 응급실 밖을 지켰지만 할아버지의 갑작스런 임종을 지켜본 건 장손인 큰동생과 막내동생 뿐이라고 했다.

너무 갑작스러워 더욱 허망하고 슬펐던 할아버지의 마지막 가시는 길은 참 혹독하게도 추웠는데
13년이 흐른 뒤, 빨라진 음력 탓에 어젠 날씨가 너무 온화해 같은 날로 인정하기가 어려웠다.
온종일 기름내를 피우며 준비한 부침개와 전, 나물과 고기를 차려놓고 버글버글 모여든 가족들과 절을 올리며 이제 확실히 할아버지 기일은 슬퍼하는 날이 아니라 가족들의 즐거운 회합일임을 깨달았다.
이북식으로 절대 빠지면 안 되는 돼지고기 편육을 자르던 나도 다른 때보다 비계가 많아 부담스러워 보이는 부위가 딱 할아버지가 좋아하시던 모양이라고 농담을 하고 있었다. 

제사 다음날이 피곤하고 뒷다리가 땡기는 후유증을 남기는 건 똑같지만
슬픔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은 노동은 확실히 여유롭다.
어른들 얘기로는 3년은 지나야 제삿날이 돌아와도 서러운 눈물이 나지 않는다고 하는데
3년만에 슬픔을 이기는 건 너무 매몰찬 것 같다.
언제부터 할아버지, 할머니 기일에 당신들을 추억하면서도 눈물을 비치지 않게 되었는지 그것도 벌써 기억이 나질 않는 걸 보면 확실히 인간은 망각의 동물인데 앞으로 몇년 더 지나면 아버지의 추억도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건 또 미리 서글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