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잇감

유럽영화제

입때 2008. 10. 25. 23:05

마음 같아선 서너 편 더 챙겨보고 싶었지만, 우리집에서 코엑스는 너무 멀고 내 처지도 그런 호사와 부지런을 떨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나마 두편이라도 챙겨본 게 어딘가 고맙게 여길란다.
본격 상영이 시작된 23일부터 일요일까지 기간중에 하필이면 땡기는 영화가 가장 적은 금요일 대낮에 찾아간 코엑스몰은 여전히 변함없이 복잡했고 메가박스는 나처럼 짧은 다리로 주파하기엔 참으로 먼 곳에 자리잡고 있었으나, 점심도 햄버거로 대충 때우고 본 영화 두편은 아름답고 긴 여운을 남겼다.
비고 모르텐슨과 난무하는 폭력이 싫어서 <이스턴 프러미스>는 보지 않겠다고 결심은 했지만 동행이 있어서 사실 무슨 영화를 보게될지 표를 끊기 직전까지 몰랐었는데, 공교롭게도 선택된 영화 두 편은 스승과 제자의 사랑을 다뤘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별것도 아닌 것에 의미 붙이기를 좋아하는 나는, 두 영화를 연속해서 보게 된 것에도 어떤 운명의 힘이 작용했을지 모른다는 억지를 품기도 했다. 

<엘레지-Elegy>
이자벨 코이셋 감독
페넬로페 크루즈, 벤 킹슬리 주연
스페인 감독이 만들어 유럽영화제 작품으로 소개된 듯한데, 배경은 뉴욕이다.
저명한 교수이자 문화계 인사인 데이빗(벤 킹슬리)의 내레이션으로 영화가 시작되자 마자 나는 곧 그의 시각에 동화되어 여주인공 콘수엘라(페넬로페 크루즈)의 아름다움을 흠모하는 마음이 무럭무럭 자라났고,
진지한 약속과 속박을 전제로 하는 관계를 두려워하는 데이빗의 심정과 그녀의 눈부신 아름다움 앞에서 자신감을 잃어버리는 늙고 나약한 마음이 백분 이해됐다.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관계맺기의 속박을 평생 거부해온 사람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은 열정적인 사랑이라니, 너무 낭만적이잖아! ㅠ.ㅠ

하지만 "사람들은 아름다운 여자들을 볼 때 그 외면의 황홀함에 눈이 멀어 내면을 들여다보지 못한다"는 명제를 뒤엎기 위하여 데이빗이 콘수엘라가 지닌 내면의 아름다움과 열정적인 사랑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인정하는 과정에 콘수엘라의 아름다운 육신을 희생시키는 건 아닌가 속상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물론 제 아무리 존경스러운 스승이며 나이에 비해 제법 훌륭한 몸과 정신을 지니고 있긴 해도 늙은 교수에겐 콘수엘라가 너무 아깝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지만, 서로 사랑한다는데야 어쩌겠나.
카메라는 기계에 불과하지만 사랑하는 이의 손과 시각을 거칠 때 특히 가장 아름다운 결과물이 나온다는 사진의 미학을 또 한번 보여준 장면들도 좋았다. 그 아름다운 흑백사진들은 당연히 다른 유명 사진작가가 찍었겠지만 어쨌든 콘수엘라에 대한 데이빗의 사랑을 나는 어두운 암실에서 드러나던 사진 속에서 제일 강하게 실감했다.
서른살 이상의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속상하게 둘이 은근히 잘 어울린다, 쳇. 
그리고 피아노 치는 남자에게 홀딱 반하는 건 나만의 약점이 아닌듯, 콘수엘라도 대뜸 이 남자에게 피아노 연주를 부탁하는데 대머리에 털복숭이인 노교수 데이빗이 그녀를 위해 피아노를 연주할 땐 강마에까지 떠오르며 나도 황홀해졌다.
클래식 문외한인 내 귀에도 영화에 삽입된 바흐와 베토벤의 곡들이 무척이나 감미롭게 들린 걸 보면 드라마의 영향이 실로 크다.


<아름다운 연인들-The Beautiful Person>
크리스토프 오노레 감독
루이 가렐, 레아 세이두 주연
프랑스 영화.
막간에 햄버거를 10분만에 해치우는 데 성공을 거둔 뒤 회심의 미소를 지었지만 카푸치노 한 잔 사가지고 상영관에 들어가려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 바람에 처음 3분 정도는 영화를 놓치고 말았는데, 속상한 마음을 달랠 겨를도 없이 나는 곧 화면에 빠져들었다. 프랑스 영화를 볼 때마다 프랑스어를 배우고 싶다는 열망이 솟구치는 것이야 종소리를 듣고 침을 흘리는 파블로프의 개 같은 조건반사 작용이라 쳐도, 영화 제목처럼 나오는 이들이 어찌나 다 예쁘고 아름다운지.

네무르와 주니

프랑스 원제가 아마도 <La Belle>인 모양인데, 그렇다면 여주인공 주니를 뜻하는 것일 게다.
일주일 전에 엄마의 장례식을 치르고 전학온 여고생 주니 역할의 레아 세이두는 그야말로 처음부터 시선을 확 끈다. 무심한 듯한 표정은 샬롯 갱스부르를 닮은 듯도 한데 크고 동그란 눈과 백옥같은 투명한 피부는 이자벨 아자니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아무튼 최소한 한달은 빗지 않은 헝클어진 머리와 똑같은 옷차림에도 영혼의 깊이가 느껴지는 표정이 참 매혹적이었다.
마찬가지로 언제나 헝클어진 머리에 새하얀 피부, 훤칠한 키로 누구든 척 보자마자 바람둥이임을 알 수 있는 네무르 선생(루이 가렐)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아니, 폭발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십대들의 면면도 하나같이 귀엽고 아름다워서 영화를 보는 내내, 아, 내가 늙어버린 건가, 하는 회한이 저절로 들었다.  
<엘레지>의 데이빗처럼 공교롭게도 네무르 역시 동료 교사와 제자를 가리지 않고 얕은 관계를 섭렵해왔건만 전학생 주니를 보자마자 운명적인 사랑을 느낀다. 쉽사리 잠자리를 같이 했던 동료 여교사와 제자에게 동시에 결별을 선언하고도 선뜻 주니에게는 다가가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그의 사랑을 예민한 주니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고 괴로워한다. 그의 곁엔 이미 순진하고 헌신적이며 착하디착한 남자친구 오토가 있기 때문.

주니와 오토


심장이 비틀리고 배가 욱신거리는 듯한 '진지한 사랑'을 하필 어린 제자에게 느끼게 된 네무르의 괴로움과
그 사랑을 직감하고 자기도 이끌리면서 영원한 사랑은 없다는 생각에 상처받을 것을 두려워하는 주니의 망설임이 너무도 절절하게 가슴을 후벼팠다.

돌아보니 나의 10대는 너무도 무미건조하였는데 (네무르 같은 매력남 선생도 물론 없었다!)
바삭바삭한 건조함은 이제 나의 트레이드마크가 된듯.












아 참,
숨쉬기 운동 이외에 전혀 몸을 쓰지 않았다가 간만에 머나먼 여정의 외출을 시도하였더니, 두 영화가 남긴 길고 애틋한 여운과는 별도로 부실한 육신은 장렬한 피로와 근육통(그러길래 높은 구두는 왜 신었더냐!)에 허덕였고 서둘러 저녁식사 준비를 마친 뒤로는 세시간이나 소파에 널브러져 시체놀이를 해야했다. 
맥빠지는 가을타령은 관두고 어서 자전거라도 타야겠다고 결심했으나, 춥고 젖은 날씨는 나를 조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