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

투덜일기 2009/07/03 15:34
열흘만인 어제 집으로 돌아왔다.
왕비마마 간병 역사상 최단기간에 귀가할 수 있었음을 기쁘게 여기고는 있지만, 수술 이후 하루하루가 롤러코스터에 올라 앉은 듯 조마조마했던 터라 아직은 걱정을 완전히 내려놓을 수가 없다.
그래도...
집에 와서 자는 잠과 집밥은 달디달다.
환자 본인도 나도 비교적 간단한 수술이라 여겼지만, 역시나 모든 수술은 똑같이 버겁고 겁나더라. 
병원행 가방싸기는 요번이 마지막이기를 성심껏 빌었더니, 바람이 엉뚱하게 작용했는지 트렁크가 망가져버렸다. 혹 정말로 마지막이라는 징조?

텅 비었던 냉장고를 다시 온갖 식재료로 가득 채워놓고 사골부터 푹푹 고는 냄새가 온통 진동하는 집안에서 이제는 느슨해졌던 번역 노동의 나사도 슬슬 조여봐야 하는데, 여전히 심신이 노곤하고 멍하다. 혈압기로 혈압 재고 혈당계로 혈당수치 재고 왕비마마한테 보조기 채웠다 풀고 수술부위 소독하는 병원놀이가 아직은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 두들기는 것보다 익숙한 느낌인 걸 보면, 바짝 긴장한 간병모드가 쉽사리 해제되지 않는 모양이다.
얼마 안되는 이 글줄도 몇번이나 지웠다 썼다 망설이며 끝을 맺질 못하겠다. 
어쨌거나 집에 와서 좋다는 얘기다. ^^
Posted by 라니

가방싸기

투덜일기 2009/06/23 11:47
그릇이나 문구용품 따위에 붙어 있는 스티커는 그냥 두고보질 못해 처음부터 떼어내고 써야 직성이 풀린다. 반면에 비행기를 탈 때 항공사 직원이 여행가방 손잡이와 몸통에 덕지덕지 붙여준 스티커는 왠지 그냥 내버려두었다가 다음번에 가방을 써야할 일이 있을 때나 떼내는 버릇이 있다. 마지막 여행이 언제였든 그 흔적의 끄트머리라도 오래오래 부여잡고 싶은 욕망 때문이겠지. 
일년 가까이 여행가방 손잡이에 붙어 있느라 누렇게 변색되기 시작한 제주발 한성항공 짐표와 스티커를 어젯밤 다 떼내고 다시 짐을 꾸렸다. 세면도구와 양말, 수건, 편한 옷과 다량의 왕비마마 속옷, 휴대폰 충전기, 커피믹스, 종이컵, 책 두 권...을 넣을 때까지는 짐짓 유쾌한 여행을 준비하는 체할 수 있었지만, 곧이어 담요, 작은 쟁반, 과도, 티스푼, 곽티슈, 그리고 약 한 보따리를 챙겨 넣으면서는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나왔다. 모녀의 동반가출을 준비하듯 메모지에 적어놓은 목록을 하나씩 지워나가는 손길이 너무도 익숙해 오히려 서글펐나 보다.
아침 일찌감치 화분에 빠짐없이 물을 주고, 될 수 있는대로 냉장고를 비우고... 떠날 준비는 모두 끝냈는데, 허무하게도 기다림은 다시 오후까지 이어져야 한단다. 여행 가방을 싸는 일은 늘 설렘을 동반했건만, 이젠 그 비율이 절반으로 떨어져버렸다. 옛날부터 따지면 8할대라 우길 수 있겠지만(처음엔 8할대라고 썼다가 고쳤다), 2, 3년전부터 따진다면 가방 싸기 두번에 한번은 여행 목적이 아니었다. 장농 옆에 세워두었던 여행가방을 꺼내 짐을 싸는 이유가 어느덧 막연한 두려움과 불안을 동반할 때가 많아졌단 뜻이다. 다음 여행을 꿈꾸며 가방에 매달 예쁜 이름표를 사들여 이미 이름까지 적어둔지 어언 2년이건만, 이번에도 그 이름표는 매달 수가 없다. 집 떠나는 건 똑같아도 팔다리와 마음이 무겁기 짝이 없는 이런 가방싸기, 다시는 없으면 참 좋겠다. 부디 다음번 이 가방을 꺼낼 땐 정말로 설레는 마음으로 떠나는 여행을 위한 것이기를.
Posted by 라니